편집위원 이 보 택

[경인종합일보] 여주시의회가 올 가을에 모셔야 할 명성황후 추모 제향비 5천만원 전액을 삭감하여 영구 보전으로 여주를 빛내야할 문화재 보전관리에 허점을 드러내고 시민들의 황후에 대한 추모정신을 흐리게하고 황후를 욕되게 하였다는 지적속에 의원들의 자질론 까지 제기되고 있다.

명성황후는 누구신가요? 뛰어난 외교로 자주성을 지키고 개방과 개혁정책을 추진하다 1895년 10월 8일 새벽에 일인들에 의해 무참히 시해되시면서 파란만장한 비운의 왕비로 가셨지만 고종왕은 1897년 8월 16일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갈망해온 황제의 나라가 되었다.

이에 따라서 고종태황제(高宗太皇帝)는 묘호(廟號)를 조선 제일대 태조왕을 고황제(高皇帝)로 묘호를 내리고 선대 7분의 묘호도 황제로 시호를 내렸다. 그리고 명성왕비의 묘호도 제국 선포해 1897년 10월 12일 명성태황후(明成太皇后)로 묘호(廟號)를 내려 황후가 되셨다.

그러나 일인들은 황후 자체를 무시하고 민비로 계속 불러오면서 생가주변 주민들에서 일부시민들 까지 민비로 불러온 황후는 여주시 능현동에서 출생하여 8세까지 성장한 유일한 생가는 문화재 보전가치로 자랑스런 문화유산이 되면서 여주를 영원히 빛내나갈 유산이 됐다.

따라서 여주시는 13년에 걸쳐 250억원을 드려 생가주변의 민가와 전답 등을 매입 66만㎡의 부지를 확보 축조된 옛집을 원형대로 보전하고 행랑채와 사랑채 별당채와 공부방 등을 복원하여 생가의 위엄을 갖추고 일제에 의해 왜곡된 역사를 바로잡는 기념관을 건립했다.

이곳 기념관엔 올바른 역사관 정립을 위한 황후의 친필과 시해당일 일본인이 사용했던 일본도(복제품)와 시해장면을 재연하는 매직비전을 상영하여 황후의 애련한 모습을 상기하고 황후의 부드럽고 정겨운 면과 냉철한 성품이 잘 드러난 20종의 친필 어찰등을 보전 하였다.

이외도 당시의 시대상황을 알 수 있는 각종 자료를 전시하고 고종황제의 친필 금래서실(琴來書室)을 비롯하여 고종태황제와 명성태황후의 친필 등을 갖추어 많은 관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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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전시관을 나오면 전면 우측에 황후의 동상과 볼거리로 조성된 연못이 상쾌하게 보인다. 이외 숙종대왕이 320연전 계비 인현왕후 생가(부원군 민유증)로 건립해준 감고당(感古堂 영조의 휘호)을 이전 복원한 한옥은 생가를 돋보이면서 관람인들 저마다 감탄을 한다.

이같이 황후의 생각가 성역화로 조성되자 황후 시해날인 10월 8일 문화원주관 극락왕생을 기원하는 영산대제 혼을 위로하는 헌작례로 추모제를 모시고 또 여성단체가 앞장 여성제관으로 구성 왕릉제향 홀기(笏記)순으로 제관 3명의 헌작례를 올리는 문화행사를 재연하였다.

이리하여 일인들이 민비로 부르면서 우리국민 대다 수 와 여주시민들 까지 민비로 알려졌던 명성황후는 생소하게 알려졌지만 황후 생가로 각계에 알려지면서 년 내국인 15만 여명과 외국인 6만 여명이 찾는 관광지의 명소로 알려지면서 황후 생가는 날로 돋보이고 있다.

하지만 여주시는 10월 8일은 시해 당하신날 추모제는 잘못됐다며 2012년 과다한 제향비 5천 만원을 세워 탄생일인 11월 17일 추모제를 모시고 다시 2013년 추모제를 모신 여주시의회는 당일 추모일이 추었다는 이유로 제향비 5천만원 전액을 삭감하는 추태를 부리었다.

이에 일부 시민들은 예산심의권을 거머쥔 의원들의 추태라며 지난해 추모일이 춥다 해도 제향비 전액 삭감은 문화유산 보전을 무시하고 자랑스러운 문화유산에 대한 모독행위로 의원들의 각성을 촉구하면서 우리의 자랑스러운 문화유산 보전에 시민정신 결집을 호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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