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인종합일보 전경만 기자]

조선의 28명 임금 중에 유난히 빛나는 왕이 있다. 제22대 임금인 정조다. 정조는 조선최초의 계획도시 수원화성을 만들었다. 정조가 위대한 것은 오늘날 세계문화유산인 수원화성을 축성한 것이 아니고 수원화성을 축조하는 과정에 있다. 조선 중기 성을 축성한다고 하면 백성들은 노임 없는 부역에 시달려야 했지만 수원화성을 축조하면서 백성들은 노임을 받았다. 그 노임은 왕실 재산인 내탕금 이었다. 노임을 받고 축성에 나선 백성들은 2년 7개월 이라는 짧은 기간에 수원화성을 만들었다.

민생을 중시했던 정조는 백성들의 소리에도 귀를 기울였다. 양반들은 정조와 평민들의 대화를 싫어했다. 그러나 정조는 능행차를 하면서 백성들이 왕의 행차를 가로막고 하는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왕의 능행차 기간 동안 곤장 세대를 맞고 왕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할 수 있었던 제도를 ‘격쟁’이라 했다. 정조는 능행차를 즐겨했으며 격쟁 또한 반가워했다.

백성들이 삶의 이야기를 자주 들은 정조는 실학자를 직접 가르치고 키워냈다. 손수 회초리를 들고 실학자 양성에 국정의 힘을 집중했다. 그것이 규장각이다. 규장각을 통해 배출된 수많은 실학자들은 조선후기의 동력이 될 뻔했다. 그러나 정조의 꿈은 중간에 끝이 났다. 나이 40세에 어린 왕자 하나만을 남겨두고 돌아가신 정조의 뒤를 이어 순조가 치세에 나섰다.

그러나 나이 어린 순조의 뒤편에서 수렴청정에 나선 영조의 계비는 순조 5년 동안 정조가 키워낸 조선의 동량들을 모조리 숙청하는 한풀이 정치를 했다. 한풀이 정치에 당한 이는 다산 정약용을 필두로 한 실학파 양반들이었다. 정조 사후 조선은 동력을 상실한 채 망국의 길을 걸었다.

뜬금없이 조선 이야기를 하는 것은 정조의 역사가 오늘날에도 배울 것이 많기 때문이다. 첫째 정치는 민생을 제일 앞에 두어야 한다는 것이다. 서민들의 삶을 돌보지 못하는 정치의 반대말은 서민을 배제하고 자신들만의 정치를 한다는 것이다. 자신들만의 정치를 했던 영조의 계비가 한풀이를 하면서 조선의 미래를 무너뜨린 것을 역사에서 배울 것은 배워야 한다.

한풀이 정치로는 누란의 위기를 극복하기 어렵다는 진실 그리고 한풀이 정치를 하게 되면 국가의 미래를 망칠 수 있다는 자성이 반드시 필요한 부분이다. 정치 분야에서 배신이라는 말이 오가고 정적 제거라는 말들이 횡횡하면 정치 아래에 있는 모든 분야에서는 핵분열 급 파장이 확산 된다는 진리를 모두가 숙고해야 할 때가 바로 지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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