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인종합일보 전경만 기자]

스페인 내전은 파시스트에 저항한 이념의 전쟁이었다. 독재자 프랑코에 저항하기 위해 19세기 이후 만들어지기 시작한 모든 이념들이 파시스트를 거부하며 합종연횡을 했던 전쟁이었다. .

20세기 중반, 의기를 품은 세계의 젊은 지성들은 너도나도 스페인 내전에 참여한다. 파시스트에 저항하기위해 세계53개국의 젊은이들은 국제여단을 조직하고 사상과 이념의 자유가 파시스트에 우선함을 세계에 알린다. 그러나 전쟁의 결과는 파시스트의 승리로 끝났다.

세계는 이 전쟁을 통해 파시스트의 위험성에 대해 충분히 알게 됐으며 그들의 위험성을 세계에 알린 것은 종군 기자들이다. 종군 기자들 중에는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를 썼던 ‘헤밍웨이’도 있으며 세계 최고의 종군기자 중 한명으로 알려진 ‘마르타 갤호른’도 있다.

스페인 내전을 통해 헤밍웨이와 사귀게 된 ‘갤호른’은 전쟁의 와중에 헤밍웨이와 결혼을 한다. 헤밍웨이의 세 번째 결혼이다. 해밍웨이는 전 부인과의 이혼에 대해 아무런 말을 남기지는 않았지만 전 부인은 이혼 서류에 서명하기 전까지 헤밍웨이에 대한 그리움을 간직했었다고 한다.

그러나 둘의 결혼은 6년을 넘기지 못했다. 둘 다 전쟁에 미쳐 전쟁지역을 따라 다니며 종군기자 생활을 했지만 글을 쓰는 작가의 입장이 주인 헤밍웨이는 낚시와 스포츠에 미쳐있었고 갤러혼은 20세기 중반에 연속해서 터진 세계대전과 베트남 전쟁 등 전쟁지역을 누비며 전쟁의 참상에 대한 고발을 계속했다. 둘은 제 2차 세계대전 당시 연합국의 역전의 발판이 된 노르망디 상륙작전에 함께 참여한 것이 그들의 마지막이었다.

둘은 각자의 영역에서 최고가 되었다. 수많은 격전지를 찾아다니면서도 네 번이나 결혼을 했던 헤밍웨이는 거의 모든 대작을 자신의 부인들에게 바쳤으며 겔호른은 스페인 내전과 2차 세계대전, 제3차 중동전쟁에 참가했으며 그리고 81세의 나이에도 미국의 파나마 침공에 대한 종군 기사를 썼다.

세상이 바뀌고 첨단시대를 열어가는 한국이지만 한국 사회는 여전히 사농공상의 유교식 계급주의가 사회전반에 깔려 있는 것이 현실이다. 일본으로부터 독립한 후 세월이 흘러 첨단국가가 된 한국은 여전히 과거의 망령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했다. 오늘날 시각으로도 이해하기 힘든 헤밍웨이의 결혼과 갤호른의 종군 기행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지 않는다. 단지 그들의 역량과 재능에 대한 찬사만 있을 뿐이다.

특히 약자와 힘이 없는 사람들을 위해 종군 기사를 썼던 갤호른의 투지가 넘쳤던 행동하는 양심은 오늘 현재를 살아가는 수많은 저널리스트들의 귀감이다. 그런데 일부 저널리스트들이 약자와 억압받는 사람들을 회피하고 재능이 있는 유명 영화감독과 또 앞으로 무엇을 이루어 낼지도 모르는 젊은 여성 연예인의 연예 뒷담화만을 따라다니며 전파와 지면을 낭비하는 것은 심히 유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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