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인종합일보 전경만 기자]


1910년 전후 수많은 조선의 사람들이 압록강과 두만강을 건너 타국으로 넘어갔다. 조선말에는 조선정부 관리들의 학정을 피해 넘어가기도 했으며 일제의 눈을 피해 또는 독립운동이라는 뜻을 품고 타국으로 넘어갔다.

그렇게 타국으로 넘어간 사람들은 한곳에 모여 살면서 조선인이라는 긍지를 자랑스럽게 여기며 살아갔다. 그리고 그곳에서 조국의 독립에 대한 꿈을 키우며 무장을 하기도 하고 사라진 정부 대신에 임시정부를 구성해 대한제국의 모든 것을 대변했다.

그들의 이야기는 전설이 아니고 딱 100년전 우리 아버지의 아버지들의 이야기다. 청산리 전투에서는 일본군을 패퇴시키기도 했으며 하얼빈에서는 일본의 국부로 추앙받고 있었던, 그러나 우리에게는 같은 하늘아래에 살수 없었던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하기도 했다. 이토를 저격한 안중근 의사는 저격 당시 당황하지 않고 자신이 대한의 아들임을 당당하게 밝혀 중국인들의 가슴에 불을 지피기도 했다.

그러나 그들 모두의 지위는 난민 이었다. 주권이 사라진 나라의 백성들이 타국을 떠돌며 독립의 꿈을 그렇게 갈망했기에 대한민국은 1945년 8월15일 독립을 할 수 있었다. 세계2차 대전이 끝나고 제3국에 해당하는 모든 나라가 다 한 날 한 시에 독립한 것은 아니다. 한국처럼 임시정부를 가지고 독립에 대한 의지를 세계에 보여 주었던 나라만 간신히 독립했다. 서구의 식민지 지배를 받았던 수많은 제3국들은 이차대전이 끝나고 나서도 짧게는 5년 길게는 10년이 지나서야 독립을 했다. 그러나 한국은 이차대전이 끝나자마자 독립했던 것이다.

한국 주변에 있는 나라들 중에는 2차 대전 이후에 독립을 하지 못한 나라도 있다. 서구 열강들과 일본이 식민지 전쟁에 뛰어들었을 당시 합병되었던 오키나와가 독립하지 못했고 대만도 완전한 독립을 이룬 것이 아니었다. 한국만이 독립했다.

한국만 독립할 수 있었던 이유에 대해 현 정부와 관료들은 애써 무시하고 있다. 그저 미국이 일본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을 투하하고 일본이 무조건 항복을 했기 때문이라고만 생각하고 있다. 역사에 만일은 없지만 우리 스스로 독립하려는 의지가 없었다면 한국은 독립하지 못했다.

상해 임시정부의 군사령관 이었던 장준하 선생은 “조국이 독립하는 그날까지 돌배게를 마다하지 않겠다”고 할 만큼 독립에 대한 강한 의지를 보였으며 군대를 조직해 연합군의 당당한 일원으로 세계대전에 참전하기까지 했다. 그런 이들 덕에 대한의 독립은 순식간에 이루어 진 것이다.

그래서 대한민국의 건국일은 지난 1945년 8월 15일 아니고 상해에서 임시정부를 구성한 1919년 9월 이어야 한다. 그것이 역사다. ‘역사를 잊어버린 민족에게 내일이 없다’는 격언은 언제나 진리다. 비록 미국의 도움이 있어서 대한민국이 일제의 마수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독립운동을 했던 분들이 계시지 않았으면 미국의 승리와 관계없이 우리는 일본인으로 살아가야 햇을 확률이 훨씬 높다는 것이 국제적 관례다. 그분들에 노고에 대해 건국절로 비수를 꼽는 행위는 하지 말아야 한다.
저작권자 © 경인종합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