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인종합일보 전경만 기자]

임진왜란은 섬나라를 통일한 일본의 무사세력이 대륙으로 진출하려 했던 전쟁이다. 이 전쟁에서 조선과 일본은 약 100만 명에 달하는 사상자를 발생시키고 약 7년 동안 조선의 전 국토가 황폐화되면서 전쟁은 종료 됐다.

임진왜란 개전 초기, 일본은 단 20일 만에 조선의 심장인 한성을 점령하고 조선의 최대 군사 요충지인 평양을 향해 진격한다. 군사요새나 다름없던 평양성마저 40여일 만에 함락된다. 그리고 다시 평양성을 되찾기 위해 조·명 연합군은 수차례의 패배 끝에 간신히 평양성을 빼앗아 올 수 있었다. 그러나 평양성 전투의 핵심이었던 벽제관 전투에서 명나라 군대는 수많은 사상자가 발생했다. 이후 명나라 군대는 일본군에 대한 두려움이 커졌다.

반면 한양으로 후퇴한 일본군은 그곳에서 한국의 첫 겨울을 보내게 된다. 한국의 겨울은 일본에 비해 혹독했는지 많은 기록에서 일본군이 후퇴하기를 원한다는 내용이 등장한다. 일본군은 향수병과 돌림병이 창궐한 한성에서 철수하기 위해 명나라와 교섭을 시작한다. 당시 군작전권이 없던 조선은 이런 사실조차 몰랐다. 명나라의 사신 심유경은 일본군과 교섭을 벌이며 일본을 조선과 동등한 봉후국으로 임명한다는 제안을 했으며 내심 철수를 원했던 일본군은 이를 받아들였다.

이런 사실 조차 모르고 있었던 조선은 일본군이 약해졌으리라 믿고 공격을 주장했지만 명나라군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오히려 조선군이 명의 받지 않고 일본군을 공격했다고 질책을 받기 까지 했다. 명의 사신 심유경이 협상을 마치자 일본군은 한강에 부교를 설치하고 천천히 빠져 나갔다. 금의환향 하는 것처럼 수많은 조선의 포로들과 기술자들을 데리고 빠져 나가는 20여 일 동안 명의 이여송 장군은 일체의 공격을 허가하지 않았다.

조선의 겨울을 맛본 일본군은 대구를 거쳐 후퇴하면서 울산에서부터 순천에 이르기 까지 남쪽 바닷가를 중심으로 거대한 진지를 구축한다. 동남해안 일대에 남아 있는 왜성 들이 당시의 흔적이다. 공성전에 능했던 일본군이 성을 쌓아 버티면서 농사를 짓고 그곳에서 장기전 채비를 갖추기까지 조선군은 일본군과의 교전이 금지되었으며 조선 양민들이 수탈당하는 것을 보고만 있어야 했다. 이유는 선조가 의주에서 명의 장수 이여송에게 군통제권을 넘겨버렸기 때문이었다.

조선의 군통제권을 가지고 있는 명나라는 조선이 누구의 땅이 되어도 관심이 없었다. 단지 명나라 군에게 피해가 없으면서 일본과 빨리 휴전하는 것만을 원하고 있었다. 당시 영남지방의 백성들이 일본군보다 명나라 군대를 더 무서워했다는 기록들이 남아 있는 것은 군통제권을 가지고 있는 명나라 군대의 횡포가 극에 달했기 때문이었다. 일본이 영남해안에 성을 쌓아 공성전을 벌이는 4년 동안 조선의 기술과 기술자들은 일본으로 끌려가 다시는 돌아오지 못했다.

군인이란 전쟁이 발발했을 때만 필요한 존재이다. 전쟁이 없다면 경찰만으로도 국가의 치안은 유지된다. 전쟁이 발발했을 때 전쟁을 수행하는 군에 대한 작전권이 없다는 것에 대한 비극은 우리의 역사 임진왜란에 충분히 나와 있다. 그럼에도 해방이후 지금까지 한국은 전시작전권을 가지고 있지 못한 불완전 독립국이다. 전시작전권을 가지고 있는 나라의 군통수권자와 전시작전권이 없는 군통수권자의 위치와 지위는 다를 수밖에 없다. 북한이 남한을 대화의 상대로 인정하지 않으려는 태도 또한 전시작전권에 있다. 북한은 늘 남한의 전시작전권자인 미국과의 대화를 시도하려 했다. 이점에 대해 깊은 고민이 필요한 시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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