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인종합일보 전경만 기자] 부패옹주와 덕혜옹주


일본이 조선을 합병해 가자 고종의 시름은 깊어졌다. 고종의 시름이 깊어가는 만큼 조선의 운명도 깊은 나락에 빠져 헤어 나오질 못했다. 그런 가운데에서도 고종에게 언제나 기쁨을 주었던 사람이 있었다. 바로 ‘덕혜옹주’다. 덕혜옹주는 덕수궁의 소주방 나인이었었던 양시 소생의 공주다. 소주방 나인 양씨는 1882년 생으로 이름은 춘기(春基)였다. 1912년 5월, 서른이 넘은 그녀가 덕수궁 명선당에서 기대하지도 않았던 딸을 순산했다. 고종은 몹시 기뻐하면서 양씨를 귀인(貴人)에 봉하고 ‘복녕(福寧)’이라는 당호를 하사했다.

이후 덕혜옹주는 마지막 조선왕실에서 귀여움을 독차지하며 지냈다. 그러나 유학이라는 명목과 결혼으로 일본에 끌려가 영혼을 상실한 채 귀국한 것으로 알려졌다. 덕혜옹주가 조선 왕실의 공주로 자라는 동안 부족함이 없었다. 나라가 기울어 가는 과정 속에 있었음에도 덕혜옹주는 많은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었다고 한다. 그런 덕혜옹주를 대신할 만큼 지위가 대단한 공주급 귀족이 한국에서 최근 화제가 되고 있다.

덕혜옹주보다 더한 대접을 받고 있는 사람은 다름 아닌 권력 비선실세의 최순실씨 딸이다. 최 씨의 딸은 없는 학칙까지 고쳐 대학에 입학했다. 그것도 우리나라에서 알 만한 사람은 다 알만한 그런 명문대에 말이다. 그리고 공주급답게 학교에 출석하지는 않았지만 학점은 얻었으며 공주가 좋아하는 승마훈련을 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재벌들이 나섰다고 한다.

재벌들은 재단을 만들어 최 씨의 딸이 승마훈련에 지장이 없도록 움직였다. 재단 관계자는 최 씨의 딸이 독일에서 승마훈련에 전념할 수 있도록 숙소를 구하는 문제에서부터 체류 문제에 이르기 까지 도움을 주었다고 한다.
또한 이화여대에서는 최 씨의 딸이 학교에서 불이익을 당하지 않도록 각종 편의를 제공했다고 한다. 가히 덕혜옹주와 비교될만한 대접을 받은 것이다. 대기업 총수의 자녀라고 할지라도 얻기 힘든 대접을 받은 최 씨의 딸을 빗대어 ‘부패옹주’라는 비아냥거림이 섞여있는 신조어까지 등장했다.

‘부패옹주’와 덕혜옹주의 공통점은 둘 다 권력의 핵심부 언저리에 위치한 금수저라는 것과 기울어져가는 정권의 한 귀퉁이에서 살아 남으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다는 점이다. 다른 점이 있다면 덕혜옹주는 조선백성들에게 희망을 주었다는 것인데 반해 부패옹주는 국민들에게 절망을 선물하고 있다는 점이다.

부패옹주가 국민들에게 절망을 안겨주는 이유는 간단하다. 대학이라는 출발선이 같다고 다 같이 평등하지 않다는 것을 너무 적나라하게 보여주었다는 것이다. 밤을 세워 시험 준비를 하고 리포트를 준비한 학생들과 다르게 아무것도 하지 않았지만 너무 쉽게 점수를 얻은 사람 그리고 국민들에게는 생소한 재단 사람들이 부패옹주를 위해 일을 해주었다는 것을 알게 된 순간 국민들은 절망에 빠지고 말았다.

나쁜 권력의 속성은 공권력의 사유화이며 사유화 된 공권력을 통해 자신의 이익을 도모하려는 행위를 우리는 파시스트집단이라고 한다. 현 정부의 창조적인 공주 부패옹주사건이 알려지면 알려질수록 나락과 절망의 크기는 커져만 갈 것이 분명한 지금 그럼에도 그들의 부패가 공개되어야 하는 이유는 다시는 이런 일이 발생하지 않기 위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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