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과 중국 간 영토분쟁이 벌어지고 있는 ‘다오위다오’가 역사책에 처음 등장한 것은 1403년이다. 자신의 조카를 축출하고 왕위에 오른 중국의 3번째 황제 영락제는 북벌 정책을 펼쳐 원나라 일당들을 북만주로 몰아냈다. 그리고 중국의 수도를 남경에서 지금의 북경으로 옮겨 영토 확장과 외세의 침임을 막고자 했다. 수많은 정복전쟁에 나섰던 영락제의 수하 중 환관 정화는 영락제의 명으로 북경에서 시작해 아프리카와 아메리카 대륙을 돌아온 것으로 유명하며 정화의 항해 경로를 보면 다오위다오를 지나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다오위다오는 환관 정화의 항해일지에 들어 있지는 않지만 영락(永樂) 원년(1403년)에 출판된 <순풍상송(順風相送)>이란 책에 '조어서'(釣魚嶼)란 이름으로 역사에 처음 등장한 것을 보면 환관 정화가 이곳을 지난 간 것으로 보고 있다. 이어 1863년에 작성된 세계지도에는 이 군도가 푸젠 성(福建省)에 부속한 댜오위타이 군도(釣魚台群島)로 표시되어 있다.
그러나 일본은 지난 1895년 청일 전쟁 와중에 다오위다오를 무주지(無主地)라며 일방적으로 자국 영토로 편입시켰다. 그리고 세계 2차 대전이 끝나고 승전국인 미국은 이 군도를 자국이 위임통치하는 오키나와의 관할 안에 두었다. 그리고 1972년 미국이 일본에게 오키나와를 반환하면서 현재 일본이 실효지배하고 있다.
일본의 주장은 청일전쟁 이후에 무인도이었던 섬을 자국민이 발견해 편입시켰다는 것이고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으로 일본 정부가 타이완과 펑후 제도(澎湖諸島)를 포기하였음에도 이 군도를 미국이 오키나와의 관할 안에 두고 통치한 것은 이 군도가 타이완이 아닌 류큐 제도의 부속 도서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문제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일본 측의 주장이 허구임을 알 수 있다.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회의 당시 중화민국(대만)과 중화인민공화국(중국)이 모두 초청받지 않은 상황에서 체결된 협약이기 때문에 사실상 원인무효에 해당하지만 일본은 막무가내로 ‘다오위다오’가 자신들의 영토라고 주장하고 있다.
지난 1863년에 작성된 지도(皇朝一统舆地全图)에 이미 이 군도는 중국 푸젠 성(福建省)에 부속한 댜오위타이 군도(釣魚台群島)로 표시되어 있던 중국 영토라는 점에 대해서는 전혀 수긍을 하지 않고 있다. 일본의 억지 역사는 한국에서도 반복되고 있다.
일본 측은 한국의 섬 독도를 러일 전쟁 직후에 무인도 이었던 섬을 일본이 발견해 일본에 편입시켰다는 황당한 주장을 하면서 각종 역사사료를 철저하게 부정하고 있다. 역사부정과 과거사 부정을 무한 반복하고 하면서 주변국의 영토에 눈독을 들이는 일본에 대해 한국과 중국은 공동의 대응을 펼쳐나가야 한다.
일본이 역사를 부정하는 것은 영토에만 국한되어 있지 않다. 자신들의 침략행위에 대해서도 철저하게 외면하고 있다. 위안부 문제와 관련해서도 진정어린 사과를 하지 않고 있으며 오히려 일본 정치인들이 대거 야스쿠니 신사참배를 하며 “군국주의 일본의 잘못이 무엇인가”라며 항변하고 있다. 중국과 한국이 긴밀하게 손을 잡고 엄정한 공동의 대응을 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언제 어디서 다시 등 뒤에 총부리를 겨눌지 모르는 일본에 대한 경계는 백번을 말해도 부족하다고 역사가 대신 말해주고 있다.
전경만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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