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인종합일보 전경만 기자]



명나라를 세운 주원장은 전형적인 남방족 사람이었다. 오늘날 중국인에게 있어 남방족과 북방족에 대한 큰 의미는 많이 희석되었지만 중국 낙양성을 기준해 남쪽에 사는 사람들은 자신들을 진정한 한인(漢人)으로 생각하고 있으며 여전히 북쪽에 사는 사람들은 정통 한인이 아니며 오랑캐와 가깝다고 여기고 있다.

주원장이 명나라를 세우며 처음 수도로 정한 곳이 바로 지금의 남경(南京)이다. 중국인들의 마음속의 고향인 중국남쪽에 마음이 있다는 것을 뜻해 남경을 명나라의 수도로 삼았다. 중국발음으로는 남경을 ‘난징’이라고 한다. 남경이 수도로서의 기능을 상실한 것은 명나라의 세 번째 황제 영락제때이다. 연왕이었던 영락제는 남경을 직접 쳐들어가 조카를 죽이고 황위에 올랐다. 그리고 북평을 북경으로 개명하고 그곳을 명나라의 수도로 삼았다. 이후 청나라가 들어서면서 또 다시 북경을 수도로 삼아 지금에 이르렀다.

여진족의 후예인 청나라가 명나라에 이어 북경을 수도로 삼자 한족들은 다시 남경을 중심으로 모여들었다. 그리고 정치는 북경에서 이루어지지만 경제는 남경에서 이루어진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남경을 부유하게 만들고자 노력했다. 청나라 이후 남경을 가장 탐냈던 집단은 일본이다. 일본은 1937년 7월 루거우차오(蘆溝橋) 총격사건을 빌미로 본격적으로 중국을 침략한다.

1937년 12월 13일 남경을 침략한 일본군은 중국인을 무차별 학살했다. 일본군 사단장 마쓰이 이와네 휘하 5만 여 일본군은 중국인 포로와 일반시민을 대상으로 강간·학살·약탈을 자행했고 기관총에 의한 무차별 사격, 생매장, 휘발유를 뿌려 불태워 죽이는 등의 방법으로 학살했다. 극동국제재판 판결에 따르면, 비전투원 1만 2,000명, 패잔병 2만 명, 포로 3만 명이 시내에서 살해되었고, 근교에 피난가 있던 시민 5만 7,000명 등 총 12만 9,000명이 살해되었다. 이것은 기록에 남은 최소한의 숫자이며 실제로는 30만 명이 넘을 것으로 추정되었다.

당시 일본군은 항복한 중국군을 대상으로 총검술 훈련을 하거나 살상 훈련의 대상으로 삼았고, 여자와 어린이들을 포함한 시민들에게 석유를 뿌리고 기관총을 난사하였으며, 나이를 가리지 않고 여자를 겁탈한 후 살상하기도 했다. 총알을 아낀다면서 생매장을 하기도 했으며, 수녀와 비구니, 임신부를 가리지 않고 겁탈 살해하는 만행을 자행했다.

약탈과 살인, 강간이 자행되고 있다는 사실은 일본 정부에도 보고되었지만 일본 정부는 이 사건을 은닉하려고 시도했다. 일본 국내에서조차 남경에서의 학살 사건은 잘 알려지지 않았다. 그러나 남경에 거주하던 외국인 생존자에 의해 곧바로 세계에 보도되고 ‘르포르타주나’ 보고서에 의해 점차 더 널리 전해졌다.

침략국 일본은 한국에서 발생한 삼일운동을 강제 진압하며 인류가 인류에게 저지르면 안 되는 짓을 저지르고도 모른다고 했으며 남경에서 인류를 대학살 하고도 여전히 자신들은 그런 사건을 저지르지 않았으며 한국과 중국이 있지도 않은 일을 가공해 역사를 왜곡하고 있다는 주장을 일삼고 있다. 일본의 이런 행위에 대해 한국과 중국 그리고 북한은 공동의 전선을 펴고 반인류적 범죄를 저지른 일본에 대해 단죄를 요구해야 한다.

일본이 과거사를 부정한다는 것은 또 다시 그런 짓을 저지를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특히 일본 정치인의 야스쿠니신사 참배는 다시 한 번 반인륜적 만행을 저지르겠다는 각오이기도 하다. 정신 똑바로 차리고 일본을 경계해야 할 지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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