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인종합일보] [칼럼] 정치와 유교


한 달도 채 남지 않은 5월 9일 대선을 앞두고 정치와 종교의 관계가 새삼 우려된다. 남녀는 가급적 화합하는 게 좋지만 종교와 정치는 밀착 할수록 문제가 생기게 마련이다. 설에 의하면 사실 유교는 논리와 이성이 강한 공자라고 하는 동이족의 피가 흐르는 걸출한 사나이로부터 시작됐다고 한다.

중화 인들의 분류로 중국의 동북부 쪽과 한국 및 일본에 분포한 종족들 중 상당수가 동이족이라 했으니 아주 확률이 없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세계 4대 성인 중 한사람이 대한민국 핏줄이라니 과히 듣기 싫지는 않다. 하긴 일본인들은 징기스칸을 가마쿠라 막부시대의 무장, 미나모토 쿠로 요시츠네라고 주장하고 있는 설도 있어 주의를 끈 적이 있기도 하다.

다른 관점으로 보면 유교는 종교라기보다는 仁(인)을 근본으로 三綱五倫(삼강오륜)을 중시하는 문화를 바탕으로 하는 학문에 가까워서 절대 종교라고 칭하는 자체가 좀 난해한 면도 있다.

주군과 남녀 관계의 종적 절대성이 강한 근본 논리가 우선하는 게 유교의 근간이라 강력한 중앙집권적 지배이념이 절실했던 조선태조 이성계가 유교의 매력에 함몰이 된 것이라고 여겨진다. 사실 유교 창시는 공자가 했지만 그 후배인 맹자와 공자의 손자인 증자에 이르러 정립됐다고 볼 수 있다.

고려 말에 한반도에 들어온 유교는 엄밀히 말해서 전통 유교라기보다는 유교의 한 갈래인 송나라 때 주희가 재정립한 주자학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주자학은 일면 아이러니하게 약간의 허풍을 겸비해 위선 적인 면과 애로틱한 면 까지 담겨 있다고 생각된다.


주자학은 대부분 주군과 님에 대한 충성과 애정을 강조

시경 305편 중 風(풍)에 실려 있는 남녀상열지사 등, 님을 그리는 노래도 모두 주군(님)에 대한 그리움이나 사랑이라고 주관대로 해석한 장본인이 주희였고, 주희 또한 후일 자신의 설이 너무 강하다고 술회한 적이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런 가운데 이성계가 자아 성불을 외치는 개인적 득템 성향이 강한 불교로서는 강력한 통치가 어렵다는 현실 하에 정도전으로 하여금 각색한 유교를 제도화시키기 시작했다고 볼 수 있다.

그걸 잘 이용한 머리와 배짱이 좋은 이방원이 변질의 시초를 제공했다고 생각된다. 애초 주자학은 중국 본토에서는 큰 인기를 얻지 못했다고 한다. 그래서 생각이 깊다고 자칭하는 중국인들의 어설픈 각성을 계기로 해서 유교의 흐름은 주자학에서 곧 양명학, 그리고 훈고학으로 대세가 바뀌게 되었다고 보여 진다.

훈고학이란 말 그대로 주희에 의해서 치장이 심해진 화장 빨, 즉 확대해석을 벗기고 훈고, 곧 옛날 문헌 그대로 이해하되 왜곡하지 말자는, 반성을 내포한 유교의 학파였던 것이라고 보면 맞을 것 같다. 한국에 들어온 유교는 처음에는 강도가 그렇게 세지 않았다고 한다.

조선 초 중기까지만 하더라도 지금의 유교와는 많이 달랐다고 볼 수 있으며 서자 차별도 없고 제삿밥을 얻어먹기 위한 남아선호사상도 그리심하진 않았다고 한다.


종교가 정권의 도구가 되선 안 된다.

조선 중기까지만 하더라도 제사를 자식 중 남녀 구분 없이 돌아가면서 지냈고, 유산 상속도 남녀차별과 적자, 서자 배 다른 자손도 별로 차별이 없었다는 게 주설이다.

서자에 대한 차별은 정권을 장악한 태종이 유교도입일등공신이자 자신의 가장 큰 정적이었던 서자출신 정도전을 미워해 시작됐다고 전해지며 나중에는 양반의 양적팽창을 제어하는 목적으로 사용됐다고 보는 게 정설이라고 생각된다.

이러한 조선 초기 유교의 모습이 본격적으로 바뀌기 시작하는 것은 성종 때 사림파가 득세하면서부터라고 생각된다. 기존 수도 근방의 훈고파를 억누를 목적으로 정치적 근간을 만들기 위해서 엄격한 잣대를 강제적으로 들이댔다고 한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이후에는 조세확보를 위해 돈 많은 평민에게 양반신분을 팔기 시작하면서 갑자기 양반이 된 속물들이 위선의 바탕위에 허식과 형식위주의 양반문화로 급격하게 재편되기 시작했다고 보면 무리가 없을 것 같다.

마치 오늘 날 부동산투기 위에서 형성된 강남권에 모여 사는 신흥부유층(졸부)들의 행태와 닮아가고 있어서 씁쓸한 느낌마저 든다. 유교의 본질을 되짚어 보면서 오늘날 정치권력과 재벌 층들의 행태가 과거의 유교도입기와 왜곡 기 때와 흡사함을 느낀다. 종교가 정권을 위한 도구로 전락되는 유사성이 가슴팍으로 새삼스레 와 닿는 것은 아마도 역사가 되풀이 되면서 우리에게 주는 경고 적 교훈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인간의 오만으로 인해 백년도 못 살면서 천년을 희롱하는 우를 범하진 말았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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