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인종합일보 이승수 기자] 이재명의 ‘인생역정’

- ‘공장 노동자에서 경기도지사가 되다’

 


안동 시내에서도 1시간, 오지 마을에서 태어난 한 소년

민선7기 제35대 이재명 경기도지사 당선인은 1964년 12월 22일(만 53세)로 경상북도 안동의 가난한 가정에 7남매중 다섯째로 태어났다. 이재명 고향마을의 정확한 이름은 ‘안동시 예안면 도촌리 지통마’로 마을이라고 하기도 어려운 몇몇 사람들이 모여 살던 곳이다. 이 당선인 자신도 SNS에서 고향을 ‘지통마을’이라고 소개했던 이 마을은 경북 지방의 오지인 봉화와 접경을 이루고 있다. 행정구역으로는 안동이지만, 실제로는 봉화군에 더 가깝다. 경남 창원의 삼계초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1976년 경기도 성남으로 올라와 공장에 취직했고 중, 고등학교 검정고시를 준비해 1982년 중앙대학교 법학과 장학생으로 입학, 1986년 졸업과 함께 사법시험에 합격한다.

이재명의 어릴 적 별명은 ‘코찔찔이’였다고 한다. 이 당선인은 본인의 페이스북에 “어릴 때는 코를 너무 많이 흘려 코찔찔이로 불렸다”면서 “먹는 게 부실하면 코를 많이 흘린다”라고 덧붙였을 정도로 춘궁기 시절에는 진달래꽃을 뜯어 허기를 달래는 등 한창 먹고 성장할 시기에 굶주린 유년시절을 보냈다. 1964년생인 이재명은 1976년 초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이곳을 떠났다. 그가 13살 때 가족이 정착한 곳이 재선 시장을 역임했고 대선 경선 후보를 거쳐 현재 도지사까지의 밑거름이 된 성남이다.

 


굽어진 왼팔, 상실한 후각 등 상처뿐인 공장생활

성남으로 이사 온 이 당선인 가족의 보금자리는 지금의 상대원 시장 뒷골목, 반지하 단칸방이었다고 알려졌다. 당시 성남은 청계천에서 밀려난 판자촌 주민들과 철거민들이 몰려들어, 일종의 슬럼가를 형성했던 시기였다. 이재명의 아버지는 이곳 상대원 시장통에서 청소부로 일했으며 어머니는 시장 화장실에서 10원씩 사용료를 받으며 생계에 보탰다고 한다. 때문에 이재명도 초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중학교 입학 대신 공장에 취직해 13살의 나이에 공장 노동을 통해 돈을 벌어야 했다. 공장에서 일하는 동안에는 두꺼운 공장 철문 밖으로 마음대로 나가지도 못했기에 문을 자유롭게 드나드는 공장 관리인이 되기 위한 생각에 중, 고등학교 검정고시를 준비한다.

70~80년대의 공장생활은 어린 소년에게 너무나 가혹했다. 폭행과 폭언 등은 일상이었으며 한 푼이 아쉬웠던 시기에 업주가 야반도주를 해 3개월치의 월급을 받지 못한 일도 있었다. 또한 모터에 손가락이 감겨 왼손 중지를 다치고 함석을 절단하는 샤링기에 손등이 찢어져 뼈가 드러나기도 했다. 프레스 기계에 왼쪽 손목이 끼어 성장판을 다쳤고 이 사고는 평생 이재명의 왼팔이 굽어있게 만들었다. 화학용품 작업을 하다가 후각을 거의 잃었다는 것도 이미 알려진 사실이다. 이렇게 가혹했던 공장생활은 그에게 세 차례의 자살시도와 장애 6급판정을 남기게 된다. 하지만 이재명은 매일매일 마음을 다잡아 공장일과 검정고시 어느하나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고 결국 중앙대 법대 장학생 입학, 졸업, 사법시험 합격의 기적같은 결과를 연거푸 얻어냈다.

 


인권변호사에서 시민운동가, 정치권의 새바람이 되기까지

가진 것 없고, 장애까지 안고 있었기에 취업은 불가능에 가깝다고 생각한 이재명은 사법시험에 모든 것을 걸었고, 1986년 3월 23일 제 28회 사법시험에 합격하게 된다. 대학생활 중 광주민주화 운동에 대한 관심도 커졌던 터라 노무현 변호사의 강연을 듣고 변호사가 될 결심을 하게 된 이재명은 판·검사가 될 사법 연수원 성적임에도 불구하고 주변에 인권변호사의 길을 걷겠다고 알린 뒤 법률사무소를 열었다. 초기에는 알려지지 않은 탓도 있고 상담오는 사람들마저 너무 젊은 나이의 변호사를 신뢰하지 못해 일거리가 많지 않았던 이재명 변호사는 주로 노동운동이나 인권에 관련된 변호 활동을 펼칠 수 있었다. 이후 문민정부가 들어서 집회의 자유가 생기고 고문이나 강제진압 등이 사라지게 되어 이재명은 1995년 시민운동가로 나선다.

분당 아파트 특혜분양 사건, 공공의료원 날치기 심의 거부 등 이재명을 성남시민들에게 각인시킨 주요 사건들을 거쳐 2006년 열린우리당에 입당해 성남시장 출마로 정치계로 첫 발을 내디뎠다. 결과는 낙선이었지만 이후 통합민주당 소속으로 성남시 분당구 갑 선거구로 제 18대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하기도 했다. 두 번의 고배를 마신 뒤 2010년 6.2 지방선거에서 민주당 소속으로 51.2%의 득표율로 시장에 당선됐으며 시장으로 취임 직후 ‘모라토리움’을 선언하고 2013년 종결을 선언해 화제의 인물로 급부상했다. 이어 치러진 2014년 6.4 지방선거에서 55.1%의 득표율로 재선에 성공해 보수성향이 강한 부자동네 성남에서 새바람을 일으켰다.

 


약속을 지키는 ‘포퓰리스트’

이재명은 성남시장으로 정치권에 두각을 나타냈고 박 前대통령의 탄핵 국면 당시 시원한 사이다 발언으로 전 국민의 관심을 얻었다. 그 여세를 몰아 대선 경선후보에까지 올라 경쟁력을 보여줬고 이제 경기도지사 당선까지 걸어온 과정에서 상대 후보가 그에게 씌운 프레임이자 본인도 어느정도는 인정하는 부분이 ‘포퓰리스트’다. 하지만 성남시장 재임 당시 94.1%의 높은 공약이행율로 본인이 내세운 약속을 이행했고 무상교복·공공산후조리원·청년배당의 3대 무상복지 정책을 수많은 잡음에도 불구하고 실시했거나 현실화 단계까지 추진했다. 물론 이는 판교테크노밸리에 입주한 수많은 기업들의 법인세와 부자동네로 대변되는 성남시의 시장이었기에 가능했다는 목소리도 있다.

이제 이재명의 앞에는 1300만으로 증가한 구성원과 동서, 남북 불균형 발전으로 인해 신음하고 있는 경기도가 있다. 선거기간내내 “도민만을 바라보고 가겠다”며 두주먹 불끈쥔 약속을 지키는 ‘포퓰리스트’ 이재명의 행보에 1300만 경기도민의 눈과 귀가 쏠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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