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버지의 죽음을 밝히고자 광주교도소를 찾은 강민수 씨.

[류재복 기자] “억울한 아버지의 죽음과 명예회복을 위해 호소 합니다”<상>


- KIST대학 환경 및 신재생 에너지부분 기술혁신대상 수상자

- 대한민국 최고 발명가인 강민수 박사의 한 맺힌 ‘思父哭’


지난 10월 24일, 기자는 1977년 6월 8일 05시 05분, 광주교도소 수감중 ‘심불전’이라는 병명에 ‘순환장애’라는 이유로 사망을 한 故강상성씨의 사망이유, 그리고 그가 왜 반공법위반으로 수감생활을 했는지를 알아보기 위해 고인의 아들인 강민수와 함께 먼저 국가기록원을 방문했고 이틀 후, 10월 26일에는 광주교도소를 방문, 사망이유를 취재했다.

이날 기자는 1976년 1월 26일자 ‘재항고기각 확정’의 판결문을 입수했다. 당시 <서울민사지방법원 서울형사지방법원 인천지원 판결문> 내용을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사건 75고단1726. 반공법위반 피고인: 강상성 무직, 1938, 3, 21생. 주거 및 본적: 전남 진도군 조도면 맹성리 26. 검사 안길수 주문: 피고인을 징역 5년 및 자격정지 5년에 처한다. 이 판결 선고 전 구금일수 65일을 위 본형에 산입한다. 이유: 범죄사실 피고인은 1938. 3. 2. 전남 진도군 조도면 맹성리 26번지에서 망부 강남식의 3남으로 태어나 3세 때 부친을 사별하고 편모슬하에서 성장하여 가세빈곤으로 취학치 못하고 57년부터 전남 목포에서 안강망 어선 진해호의 학장 (취사부)으로 약 3년간 종사하다가 60년에 하선하여 의류 및 어물행상을 하던 중 입영영장을 받고 1962. 3. 2 육군논산훈련소에 입대하여 훈련을 마치고 동 훈련소 소속 23연대 5중대에 배속돼 복무하던 중 교통사고로 척추 부상을 입고 제110육군 병원으로 후송되어 치료를 받다가 1964년 8월경 일병으로 제대한 후 본적지로 귀향하여 전남 목포, 광주 등지를 전전하며 어물상을 하고 1966. 4.경부터는 부산, 여수, 인천 등지를 전전하며 선원생활을 하다가 1974. 7.경 하선하여 현재까지 경향각지를 배회하며 일일 노동에 종사하던 자로서 자신의 빈곤한 생활을 정부의 시책이 잘못된 때문이라고 잘못 판단한 나머지 은연중 북괴를 동경하여 오던 중 1975. 8. 5. 24:00경 부천시 소재 김00 경영의 구멍가게에서 빵 100원어치를 사 먹으면서 위 김00의 인근주민 김00 등 7명에게 1)박00 대통령을 죽여야 너희들도 잘살고 우리 국민이 다 잘 살 수 있다. 2)대한민국의 별짜리들은 다 죽여야 한다. 3)내가 땅굴을 3년 팠다. 4)김일성이가 승리해야 다 잘 살 수 있다. 라고 말하며 반국가단체인 북괴의 선전활동에 동조하여 북괴를 이롭게 한 것이다.

 

故강상성 씨를 반공법위반혐의로 징역5년에 처한 판결문.


1975년 10월의 ‘반공법위반 징역5년에 처한다’ 판결문 내용

“박00 대통령 죽여야 너희들도 잘살고 대한민국 별짜리들 다 죽여야 한다”

증거1. 피고인의 법정에서의 판시사실과 같은 취지의 진술, 1.검사의 피고인에 대한 피의자 신분조서 중 판시사실과 같은 취지의 진술 기재, 1.사법경찰관 사무취급이 만든 김00. 등에 대한 각 진술 조서 중 판시사실과 같은 취지의 각 진술기재. 적용법조 반공법제4조제1항제16조, 국가보안법제11조, 형법제57조, 1975. 10. 15. 판사 이재훈(도장 및 싸인)>이다.

그리고 2개월 후인 1975. 12. 16.에 서울형사지방법원 제5부는 “피고인의 항소를 기각 한다” 라는 결정을 했다. 당시 결정문 하단에는 재판장 판사 황석연, 판사 김상수, 판사 황우여 등 3명이며 1976. 1. 26.에는 대법원 제2부에서도 “재항고를 기각 한다”라는 결정을 내리면서 재판장 대법원판사 민문기, 대법원판사 이영섭, 대법원판사 김윤행, 대법원판사 김용철 등 4명의 이름이 있다.

 

광주교도소가 공개한 故강상성 씨의 사망장.


그리고 10월 26일 역시 고인의 아들인 강민수와 함께 광주교도소를 방문, 故강상성씨의 사망장을 받아보니 발병시:1977년 5월 7일, 사망시:1977년 6월 8일 05시 5분, 소장검사:1977년 6월 8일 05시 5분, 검사결과;1.심불전, 2.울형상 순환장애, 3.심장비대, 간비대, 병명:심불전, 사인:순환장애 로 적혀있고 ‘시체유골교부’라고 원을 그려 표시를 했다. 그리고 의무관 김규섭과 ‘1977. 6. 9.전남 진도군 조도면 맹성리 466. 형 姜尙文에게 시체 인도함’이라고 기재가 돼 있다.

기자가 2일간 국가기록원과 광주교도소를 취재차 방문한 것은 이미 위에서 밝힌 故강상성씨의 아들인 강민수의 제보를 받았기 때문이다. 강민수._ 그는 46세로 현재 특허를 받아 한중간에 특수 농산물교류를 위해 열심히 사업을 하고 있는 기업인이다. 지난 10월 1일, 자신의 모친(박왈례. 77)과 누이(강정숙. 56)를 기자에게 소개했다.

강 씨가 이날 기자에게 밝힌 내용은 “제가 아주 어릴 적 일로 아버지가 어느 날 갑자기 행방불명 된 후 광주교도소에서 연락이 와 어머니와 누나가 아버지를 면회 했는데 아버지는 말도 못하고 겁에 질린 사람으로 얼굴만 보고 헤어졌는데 그 후 교도소 안에서 사망을 했다는 연락을 받고 어머니와 큰아버지가 가보니 시신이 아닌 이미 화장을 한 유골을 받았다”면서 “왜 우리 아버지가 반공법위반이라는 죄인으로 교도소에 수감이 됐고 또 왜 교도소에서 사망하셨는지를 밝혀보려 한다”고 말했다.

 

남편의 죽음에 대하여 의문을 갖고 털어놓는 故강상성 씨의 아내 박왈례 씨.


돈도 벌면서 지역위해 봉사 했던 아버지 갑자기 소식 끊겨
행방불명된 아버지, “교도소에 있으니 면회 오라” 연락받아

그러면서 그는 “신문 등 뉴스를 통한 보도를 보니 아버지와 비슷한 사건들이 수 십 년이 지나서야 진상이 밝혀지고 피해당사자가 무죄를 받는 사례가 있어 이제라도 아버지는 고인이 되셨지만 자식 된 도리로 아버지의 죄명과 사망이유를 알고 싶다”고 말하기에 기자는 당시의 상황을 잘 알고 있을 강 씨의 어머니인 박왈례 씨를 상대로 질문을 하면서 내용을 파악해 보았다.

“남편과는 한 마을에서 태어나 중매를 통해 결혼을 했다. 남편은 인정도 많고 남을 도와주는 봉사정신이 강해 마을에서는 그를 매우 좋게 봤다. 또한 남편은 열심히 일을 해서 돈도 모으고 땅도 사고 집도 짓는 등 남부럽지 않은 생활을 했다. 그때는 목포에서 살았다. 그의 직업은 배를 사서 어부들을 데리고 고기를 잡는 사람이기에 주로 바다에서 생활을 했고 나는 남편이 갖다 주는 생활비로 풍족한 생활을 했지만 안타깝게도 내가 일자무식이기에 주로 친정인 진도에 가서 생활을 했다.”고 강민수 씨 어머니가 말했다.

그는 이어 “그렇게 생활을 했던 남편이 어느 날 부터 오랫동안 소식이 끊겨 매우 궁금했는데 뜬금없이 ‘광주교도소에 남편이 있으니 면회를 오라’는 통보를 받고 딸 강정숙(63년생, 당시 15세)을 데리고 광주교도소를 찾아가 남편을 만나 ‘당신이 왜 여기 있느냐?’고 묻자 남편은 대답도 못하고 완전히 정신이 나간사람으로 보였다. 교도소에 알아보니 남편의 죄명은 반공법위반으로 이미 1년 이상을 살고 있었다.”고 말했다.

<하>편에 계속

 

 

故강상성 씨가 광주교도소에서 사망한 것을 증명하는 제적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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