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故강상성 씨의 가족들. 우로부터 아들 강민수, 부인 박왈례, 딸 강정숙
[류재복 기자] “억울한 아버지의 죽음과 명예회복을 위해 호소 합니다”<하>


- 반공법위반 혐의로 징역 5년 선고받고 복역 중 돌연 사망

- 교도소, 시신인계 안하고 화장 후 유골로 전해준 것도 의문



박 씨는 “남편을 면회하고 돌아와 이 사실을 마을 주민들에게 알리자 마을 주민들은 남편의 석방을 위해 집단으로 연명을 해 탄원서를 작성해서 교도소에 제출 했다. 그런데 한 달 후 남편이 교도소에서 사망을 했다는 전보를 받았다. 이에 시아주버니와 함께 교도소에 가보니 이미 남편의 시신은 화장으로 처리되고 유골만을 주기에 받아와 남편의 고향인 조도에 묘지를 썼다”고 말했다.

이 후, 박 씨는 어린 자식들과 고생길로 접어들기 시작했다. 남편이 죽기 전 까지는 돈도 많고 땅도 많아 남부럽지 않은 호의호식 생활을 했지만 일자무식인 이유로 박 씨는 남편 강 씨가 세상을 떠난 후 그 많던 재산들이 어디로 간지를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누군가가 남편이 벌어놓은 돈과 재산을 모두 빼앗아 가기위해 남편을 일부러 교도소에 집어넣고 죽인 것 같다.”고 박 씨는 말했다.

박 씨는 또 “그 때 나는 무식해서 반공법이 무슨 법인지를 몰랐지만 남편이 교도소에서 유골로 나온 후 3남 1녀의 자식들을 데리고 살아가기에는 정말 힘들었다, 특히 남편이 반공법위반으로 징역을 살다가 죽었다고 하여 주변의 심한 냉대와 멸시를 받고 살 때는 차라리 자살이라도 하고 싶었다. 정말 하루하루를 산다는 것이 힘겨웠다. 이때 큰딸 (당시 15세)과 아들 강운청(당시12세), 강성철, 강운종을 키우며 살기위해 별짓을 다했는데 그때 아들 강운종은 먹지를 못해 굶어 죽었다”며 울면서 말했다.

박 씨는 이어 “그간 정말로 겁나게 고생을 했다. 수없는 셋방을 전전하며 굶는 것은 다반사고 어떤 때는 잘 때가 없어서 냄새나는 헛간 옆에서 잠을 자는 등 한 맺힌 서러움 속에 자식들을 키웠지만 특히 굶어죽은 아들 때문에 항상 죄책감 속에 살고 있고 또 큰아들은 어릴 적부터 가족들을 위해 일만 하다가 사고를 당해 현재 장애 1급이 되어 13년간 딸이 24시간 간병을 해주고 있다”고 또 흐느끼면서 말했다.


석방 위해 주민들이 연명 탄원서 올렸지만 교도소 측 묵살
“아버지가 왜 교도소에 갔고 왜 교도소에서 죽었나?” 의혹

어머니 옆에 있던 딸 강정숙씨도 말을 했다. “가장 궁금한 것은 아버지의 죽음이다. 너무도 억울하다. 왜 돈도 잘 벌고 잘 사시던 아버지가 왜 무엇 때문에 교도소에 들어갔고 왜 그곳에서 사망을 했고 또 아버지의 그 많던 재산이 도대체 어디로 갔는지? 정말 아버지의 죽음에는 많은 의혹이 있다. 지금 생각해 봐도 당시 누군가가 아버지의 재산을 빼앗기 위해 조작을 한 사건 같다”고 말했다.

故강상성씨의 둘째아들 강민수, 그는 자신의 아버지에 대한 행적을 알아보려고 올해 초 광주교도소를 방문, 자신의 아버지가 왜 교도소에 수감이 되고 왜 교도소에서 죽었는지 그 이유를 알아보았다. 그러나 죄명인 반공법위반으로 1975년에 징역형 5년을 선고받고 서울 서대문구치소에 수감된 후 광주교도소로 이감된 것, 그리고 그곳에서 1년 반을 지내다 돌연 사망을 한 것만 밝혀냈다.

이날 그는 “아직도 아버지가 반공법위반으로 구속 수감생활을 했지만 그 구속사유가 무엇인지? 판결문도 볼 수가 없어 알 수가 없다”면서 “가끔 방송을 보면 반공법위반으로 수 십 년 장기수로 복역을 하다가 석방되거나 죽고 나서야 재심을 청구해서 무죄로 밝혀지는 사례가 있어 나도 아버지께서 분명히 죄를 뒤집어쓰고 그렇게 된 것으로 확신하기에 아버지의 명예를 벗겨드리려고 기자님을 만난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또 “광주교도소를 찾아가 아버지의 신상을 알아보니 아버지의 출생이 주민등록상으로는 1936년생이고 교도소에는 1938년생으로 기록이 돼 있었다. 그리고 주소도 각 각 달랐다”면서 “들리는 말에 의하면 아버지를 석방시키려고 마을 분들이 탄원서를 냈지만 교도소에서는 아예 묵살을 하고 오히려 수없는 구타와 가혹행위를 해 돌아가실 때 까지 참혹하게 고문당해서 사망하지 않았는가 싶다. 한 할아버지께서 그 당시 본인도 수감생활을 했는데 그때는 고문이 심했던 시절이라서 저희 아버지도 그렇게 시달리다가 돌아가신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그는 또 “아버지의 시신은 원래 우리 가족들에게 인계를 해 줘야 하는데 얼마나 참혹했으면 교도소에서 화장을 해 유골을 전달했을까 하는 의구심이 들면서 그 과정에는 분명히 의혹이 있다고 보며 이 일로 인해 어머니 역시 충격을 받아 2년간 정신을 잃고 살아야 했으며 아버지가 관리했던 재산은 모두 어디로 갔는지 의문이며 아버지 사망 이후로는 공부를 잘했던 누나는 생계를 위해 식모살이를 해야 했고 가족들은 모두가 살기위해 참혹한 세월을 보내야했다”면서 그도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故 강 씨 사건, 유신판사들이 저지른 판결로 사법농단의 적폐
재산탈취 위한 조작사건으로 교도소 보내고 살해의혹 갖게 해

이어 그는 “그러나 우리 가족들은 환경에 굴하지 않고 열심히 살아왔으며 나는 독학으로 공부를 해 대입검정 최연소 수석합격을 했고 그 후 대한민국 최고발명가로 성장, 2015년 대한민국 KIST대학에서 환경 및 신재생 에너지부분에서 기술혁신대상을 받았다”면서 “이 나라, 이 사회를 위해 헌신하고 노력을 한 우리 아버지가 왜 반공법 위반자가 돼 비참하게 죽었는지 그 사유를 분명히 알고 싶다”고 말했다.

그 후 기자는 아들 강민수 씨와 함께 의혹을 풀어보려고 국가기록원과 광주교도소를 방문해 반공법위반죄를 판결한 판결문과 사망이유를 살펴봤지만 판결문은 엉터리로 보였다. 설령 그 판결문 내용이 사실이라 해도 반공법위반이란 죄명을 뒤 집어 씌운 것은 잘못된 판결이다. 당시 2심 판사였던 황우여 전 한나라당 원내대표에게 기자가 찾아가 이에 대한 질문을 던지자 그는 “수 십 년 전의 일로 잘 모르겠다”면서 즉답을 회피했다.

황우여 당시 판사 말고도 이 사건을 판결한 판사들은 박정희 긴급조치에 가담한 유신판사 522명에 속한 법관들로 앞으로 이들은 역사의 법정에 서게 될 수도 있다. 당시 이들 판사들은 중앙정보부의 고문에 의한 자백은 그대로 반공법위반, 보안법위반으로 죄목이 됐으며 검사도 판사도 앵무새처럼 그것을 되풀이 하면서 판결을 했던 시절이었다.

또한 광주교도소를 방문해 “당시 교도소는 왜 시신을 가족에게 돌려주지 않고 화장을 해 유골만을 전달한 이유가 무엇인가?”라고 물었지만 총무과 담당자는 “우리도 알 수가 없다”는 말만 되풀이 했다. 故강상성씨에 관련된 의문의 교도소 수감과 사망사건 취재를 마치면서 기자가 느낀 감정은 바로 “최첨단의 현대에서도 대법원장이 사건을 조작한 재판의 내용들이 양심적인 정권으로 인해 적폐청산 차원에서 세상에 공개가 되는 현실인데 42년 전의 이 사건이야 말로 충분히 조작을 할 수 있는 사건이다”라고 느꼈다.

그러나 더더욱 큰 이유는 누군가가 故강상성 씨의 그 많은 재산을 탈취하기위한 수법으로 고인을 반공법위반으로 몰고 갔고 또 흔적을 남기지 않으려고 교도소에서 살해를 했다는 확신 감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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