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인종합일보 이승수 기자] [3.1절 100주년 특집기획] 수원과 만주에서 항일운동을 펼친 독립운동가 ‘임면수’<상>

본지는 3.1운동 및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아 오늘날 상전벽해를 이룬 대한민국이 있기까지 일제강점하에서 모진 시련과 고난을 겪으면서도 독립에 대한 열망을 잃지 않고 투쟁했던 경기도의 독립운동가에 대한 특집을 기획했다. 우리나라의 역사를 기억하고 위대한 투사들의 숭고한 정신을 되새기며 3.1운동 100주년의 의미를 되뇌어 볼 기회가 되길 바란다.


나라를 빼앗길 위기에 놓였던 구한말 임면수는 국권을 되찾으려는 일념으로 독립협회, 상동청년학원, 신민회 등의 애국지사와 교류하면서 민족의식을 키웠다.

수원 삼일학교를 설립해 인재를 길러냈고 수원지역의 국채 보상운동을 주도했다. 그는 여성교육을 위해 자신의 집터와 토지, 과수원을 삼일여학교(현 매향여중고)부지로 희사했다.

이후 만주로 건너가 신흥무관학교 분교인 양성중학교 교장으로 재직하며 독립군을 양성하고, 부민단 결사대 대원으로 활약하는 등 평생을 항일투쟁에 몸을 바쳤다.

“임면수는 여성교육을 위해 가대(家垈)와 토지, 과수원을 현 매향 정보중고등학교 부지로 희사했다. 어찌 선생의 후덕을 잊으리오. 그러나 선생은 삼일중학교에 추호만 한 학교권리도 개의한 바 없는 의인이었다” -삼일학원 65년사-

청년기부터 임면수는 수원지역을 중심으로 계몽운동을 펼치기 시작했다.

임면수는 내 고장부터 개화시키고 신학문으로 인재를 길러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런 일념으로 그는 수원 지역의 동지와 청년을 규합해 대표적인 근대 학교인 삼일학교를 설립하고 교장으로 재직하며 신교육체제를 정립했다. 수원 지역 국채보상운동을 주도하기도 했으며, 기호흥학회 수원지부 평의원으로도 활동했다.

1910년 일제가 조선을 강제 병합하자 독립운동 기지를 건설하기 위해 이듬해 2월 만주 서간도 환인현 횡도천으로 망명했다.

만주에서 그는 신흥무관학교 분교인 양성중학교 교장으로 독립군양성에 힘썼다.

1910년대 중반에는 부민단의 결사대로 활동했으며 3·1운동 이후 봉화현에서 해룡현으로 근거지를 옮겨 항일투쟁을 하다 일제에 의해 체포돼 투옥됐다.

수원출신으로서 만주로 망명해 독립운동을 한 인물이 거의 없는 점에서 임면수의 민족운동은 경기도와 수원의 독립운동사에서 각별한 의미가 있다.


수원 화성학교 졸업

임면수는 1874년 6월 13일 수원군 수원면 매향리에서 아버지 임진엽과 어머니 송씨 사이에서 2남으로 출생했다. 본관은 나주이며 한자 이름은 임면수(林冕洙), 또는 임면수(林勉洙)다.

호는 필동(必東), 또는 필동(弼東)을 사용했다. 임필동은 만주로 망명해 독립운동을 할 당시에 주로 썼다.

임면수는 19세 때 전현석과 결혼했다. 임면수는 향리에서 전통교육을 받았지만 조선 개항 이후 근대화 바람이 불자 근대적 실용 학문에 관심을 기울였다. ‘황성신문’ 1906년 11월 6일자에 임면수의 수원양잠학교 졸업 기록이 있다.

1903년 이학교 추기(秋期) 졸업자 명단이다.

당시 우등은 양재순과 최석규였으며, 임면수는 홍정유 등 5명과 함께 졸업했다.

수원양잠학교에 대한 기록은 별로 알려진 것이 없다. 다만 춘기 시험과 하기시험성적이 황성신문에 공고될 정도된 것을 보면 이 학교에 대한 세간의 관심이 컸던 것을 짐작 할 수 있다.

수원양잠학교를 졸업한 임면수는 일어를 공부하기 위해 화성학교에 진학했다. 수원양잠학교 졸업이 1903년 말이었으니 그는 약 2년 동안 화성학교에서 일어 공부를 한 것으로 보인다.

황성신문 1905년 5월 9일 ‘화교졸업’에, 임면수는 1905년 4월 26일 수원화성학교를 6명의 동료와 함께 졸업했다고 나와 있다.

임면수가 다닌 수원화성학교는 어떤 곳일까. 일본인 쯔루타니는 1900년 4월에 조선어 연구생으로 일본 정토종의 명을 받고 한국으로 건너온 인물이다. 쯔루타니가 1901년 서울로 활동무대를 옮긴 이후 화성학교 일본인 교장 겸 교사로 미와가 부임했다.

그는 1902년 6월에 수원에 거주하며 일어를 가르쳤다. 미와의 교장 취임 이후 수원화성학교는 본궤도에 올랐다.

임면수는 일어에 능했음에도 일본과 관련된 일을 한 학생들과는 전혀 다른 길을 걸었다. 졸업 후 상동청년학원에서 민족교육을 받고 수원에 거주하면서 구국운동을 펼치고, 만주에 망명해 독립운동을 전개한 것은 그가 비록 친 일본학교에 다니며 일어를 배우긴 했어도 항일 정신을 잃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수원에서 멕시코 이민 모집 대리점 운영

임면수는 1904년 말부터 이듬해 초기까지 수원에서 멕시코 이민 모집 대리점을 운영했다. 황성신문 1904년 12월 17일 농부 모집광고에도 실려 있다.

임면수가 멕시코이민 대리점을 운영한 것은 그의 종교와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기독교인이었던 임면수는 인천 내리교회의 중심인물이며 멕시코이민을 주도했던 존스 목사와 인연을 맺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존스 목사는 1867년 미국 뉴욕에서 태어나 신학교를 졸업한 후 1887년 9월 내한했다.

1892년 인천지역 감리교회에 부임한 이래 내리교회를 중심으로 44개 교회를 창설하는 등 전도활동에 노력을 기울였고, 한국감리교회의 발전에 크게 이바지 했다. 그는 ‘신학월보’와 ‘The Korean Repository’,‘The Korean Review’의 주필로서 한국 내 기독교인 동정과 한국문화를 국외에 널리 알리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군대해산 당시 선교사인 애비슨, 민휴 등과 부상당한 군인을 치료하는 등 독립운동을 지원하기도 했다. 존스목사의 한국인에 대한 애정과 관심은 이 후에도 지속됐다.

존스목사는 한국인 최초의 해외 집단이주인 하와이 이민에도 결정적인 역할을 하기도 했다.

1902년 12월 처음으로 하와이 이민을 떠났던 121명 중에는 내리교회 교인들이 상당수 포함돼있었다.

내리교회에 영화여학교를 설립한 존스 목사의 부인은 인천 지역의 근대 여성교육 개척자다. 존스 부인은 수원 삼일여학교 설립에도 관여했는데 삼일학교 발기인인 임면수는 부인을 통해 존스목사와도 친분을 맺고 있었을 것이다.

임면수는 존스목사의 활동을 보고 민족의식을 키웠을 것으로 여겨진다. 임면수가 멕시코 이민 수원 대리점을 운영했던 것은 이런 연유일 것이다. 수원에서 모집 된 이민자는 전체 1,033명 중 6명으로 많은 숫자는 아니었다.


상동청년학원에서 민족교육을 받다

1905년 화성학교를 졸업한 임면수는 국권 회복의 뜻을 품고 상경해 상동청년학원에 입학했다. 임면수는 상동청년학원에서 영어와 일어, 측량을 공부하기도 했다. 또한 기독교에도 정식으로 입교했다. 상동청년학원은 1905년 상동교회 전덕기 담임목사가 설립한 중등부 과정의 교육기관이다.

전덕기 목사는 초등교육기관인 공옥여학교와 공옥남학교도 설립했다. 상동청년학원은 1904년 10월 재미 교포 강천명이 교육 사업에 써달라고 돈 5원을 재원으로 설립됐다.

상동청년학원은 구국운동에 헌신할 인재를 양성했다. 투철한 민족정신을 키워주기 위해 다양한 교육을 실시했다. 한글보급운동, 한국사 강의, 외국어 강의, 군사 훈련 및 신문화 수용과 전파, 지도자의 자기수양(종교훈련) 등을 가르쳤다.

한글보급운동의 중심 역할은 주시경이 맡았다. 주시경은 1907년 7월 1일부터 상동청년학원 학생들에게 여름방학을 이용해 국어강습회를 열어 국문법을 가르쳤다. 수업과목은 음학, 자분학, 격분학, 도해학, 변성학, 실용연습 등 6과목이었다. 일요일마다 2시간 정도 정기적으로 강의하면서 국어의 중요성과 과학성을 강조했다.

또 1907년 11월부터 1909년 12월까지 국어 야학과를 설치해 국문법을 가르쳤다.

더불어 한국사와 한국지리, 교련시간을 강화해 학생들에게 민족의식과 역사의식을 고취시키고 독립정신을 함양하는데 힘썼다.

특히 교련시간에 학생들은 목총을 메고 군가를 부르며 북소리에 맞춰 행진했다고 한다.

임면수의 비문에도 쓰여 있지만 상동학원은 말하자면 기독교 중견인물들과 애국인사들의 총 집합소였다.

임면수는 이곳에서 유학하면서 독립협회가 주최하는 강연회나 토론회에 참석해 식견을 넓혔고 민족주의 의식을 키워나갔다.

임면수가 상동청년학원에서 공부한 기록은 허영백이 작성한 임면수의 비문에 잘 나타나있다.당시 구한 말 선생은 뜻한 바 있어 수원에서 서울로 상경했다. 상동감리교회 안에 설립돼 있는 청년학원에서 영어와 일어와 측량을 공부하면서 기독교에 입교했다. 상동청년학원은 상동교회의 담임목사 전덕기 목사가 설립했다. 당시 이곳은 기독교중견인물들의 집합소이며 애국자들의 총 집합소였다.

임면수는 서울에 유학하면서 교회와 독립협회가 주최하는 강연회니 토론회니 정부탄핵 연설장이니 강습회니 빠짐없이 따라다니며 식견을 넓히고 인격 향상에도 노력했다.

특히 강화에서 사학을 30여 처나 설립하고 독립교육에 매진하고 있는 이동휘씨의 감화를 많이 받았다. 그리해 선생은 국가민족의 항로를 계몽하고 선도하는 지침이 오직 교육부터라는 것을 절감하고 행리로 돌아와 신교육을 개척하고자 했다. 상동청년학원에서 임면수가 받은 교육은 그가 민족주의와 인재양성에 눈을 뜨고 나아가 독립운동에 몸을 바치는 데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 비문에 나타난 것처럼 임면수가 이동휘(1873~1935, 독립운동가)를 만난 것도 상동청년학원에 다닐 때였다.

이동휘는 임면수의 민족의식 형성에 큰 영향을 준 것으로 보인다. 기독교인이면서 민족주의자였던 이동휘는 경기도 강화에서 사학을 30여 곳이나 설립해 교육과 독립운동에 매진한 인물이다. 만주로 망명한 뒤에도 임면수는 상동청년학원 출신인물들과 함께 활동했다.

 


수원지역의 국채보상운동을 주도한 대표적 인물

1907년 2월 대구에서 서상돈 등의 제안으로 일본 차관 1300만 원을 국민 모금으로 갚아 주권을 회복하자는 국채보상운동이 일어났다. 이 운동은 국민들의 호응에 힘입어 전국적으로 확산됐다. 임면수는 이하영, 김태제 등과 함께 국채보상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이들은 국한문 취지서를 자비로 발간해 부민들의 동참을 호소했고 수원뿐만 아니라 경기도 각 군에 배포했다.
대한매일신보 1907년 3월 9일자 3면 잡보에, ‘임면수, 이하영, 김태제 3인이 국한문 취지서를 자비로 발간해 부민들의 동참을 호소했음’이라고 게재돼있다.

또한 대한매일신보 1907년 3월 26일 3면 잡보에는 “수원부 사는 김제구, 이하영, 임면수 3씨는 기독교인으로, 애국성이 분발해 금번 국채보상에 열심 주선해 특설 1회하고 취지서 수백도를 발간해 경기 각 군에 광포했는데, 불과 2,3일에 의연금이 500여원에 달했더라”라는 기사가 실렸다. 즉 취지서 수백 장을 발간해 수원뿐만 아니라 경기도 각 군에 배포했음을 보여주고 있다.

임면수 등이 배포한 국채보상 취지서는 대한매일신보 1907년 3월 29일자 1면 잡보 ‘국채보상취지서’에 실려있다.


국채보상취지서 ‘번역문’

무릇 국민의 의무는 진실로 애국에 있고 애국의 참마음은 오로지 보국안민에 있음은 거론한 필요도 없거니와 1천3백만원 외채가 있다는 설이 나라 안에 전파된 이후로 일반 뜻있는 선비와 백성이 서로 크게 한숨지으며 눈물 흘리지 않은 자가 없었다.

아직 분발해 의논을 내놓지 않음에 이 거액을 갚을 계획이러니 다행히 충의의 참마음이 먼저 영남의 신령한 구역에서 흘러넘쳐 단영동맹이 우리 2천만 동포의 뇌수에 고동치매 마을의 어리석은 백성들과 어린아이들과 심지어 병자와 거지들까지 의연에 힘을 다해 스스로 응모한 사람이 구름처럼 모여들었다.

우리의 성스럽고 인자하신 황상폐하께옵서 백성의 뜻을 구휼히 통찰하시어 특별히 금연하시겠다는 칙교를 내리시고 정부 고관 모모씨도 또 단연하고 의연하겠다는 확고한 뜻을 펴니 이는 하늘이 우리 대한을 돌보고자 한 것이 아니겠는가. 장하고 위대 해라, 단연동맹회의 논의를 일으킴이여. 충성되고 의로워라, 대구 광문회 사장의 분발이여. 이는 과연 사람의 힘으로 이룬 바가 아니요 확실한 하늘의 돌봄이로다.

국권의 독립이 반드시 이 거사에 있음이요, 민권의 자유도 역시 이 거사에 있은 즉 진실로 우리 대한의 신민 된 자 누가 협력 찬성하지 않겠는가.

충의를 이루려고 하는 바 앞뒤를 계산하지 않을 새 이에 하나의 모임을 만들어 감히 공포하니 경기 서쪽의 동포여, 많고 적음을 개의치 말고 힘에 따라 의연으로 외국 채무를 보상해 우리 삼천리강토를 보존하고, 우리 2천만 생명을 보존하기를 피눈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수원영어삼학당찬성회 회장 김제구, 서기 이하영, 임면수

임면수는 취지서를 찍어 배포했을 뿐만 아니라 “나라를 진정으로 사랑하는 마음은 재물을 가볍게 여긴다”며 거리 홍보에도 적극적으로 나섰다. 임면수가 주도한 국채보상운동은 큰 반향을 일으켰다.

수원지역에서는 취지서 발표 2~3일 만에 500여원이 모금될 정도로 국채보상운동에 대한 열기가 뜨거웠으며 참여한 계층도 다양했다. 6세 아동 신천동이 세뱃돈 50전을 기부한 사례는 많은 이들에게 감동을 주었다. 이처럼 경기도와 수원의 국채보상운동은 임면수의 열성적인 활동으로 전국 어느 지역보다 활발하게 펼쳐졌다.

수원부 국채보상회 재무원이자 지역 유지인 나중석과 차유순 등도 운영 경비를 스스로 부담하는 등 임면수와 함께 국채보상운동을 주도했다. 임면수 등의 활약에 자극을 받은 주민들도 경쟁적으로 의연금 모금에 나섰다.
모금 열기는 갈수록 뜨거워져 관립수원농업학교, 수원공립보통학교 직원과 학생도 참여했다.

국채보상운동은 단지 모금으로 끝난게 아니었다. 주민들에게 근대교육의 필요성과 자립경제 수립을 위한 경각심을 일깨워 주었다.

모금은 1907년 8월 초까지 계속됐다.

<하편에 계속>

저작권자 © 경인종합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