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인종합일보 이승수 기자] [3.1절 100주년 특집기획] 수원의 유관순 이선경 <하>


서울로 통학하며 결성된 ‘수원학생 친목회’

구국민단의 주요 인물들은 수원 출신으로 서울로 유학한 지식인 청년들이었다. 이들의 공통점은 수원에서 기차를 타고 서울로 통학하였다는 점이다.

이미 1917년에 수원거주자로 중등학교 정도의 학교 재적생으로 조직된 ‘수원학생 친목회’가 조직되어 있었다. 서울로 유학한 학생들과 수원에서 기차로 통학하는 학생들의 모임이었다. 1924년 수원학생친목회의 신입회원은 중동3, 배재 6, 양정 3, 보성 4, 이화 2, 중앙 1, 선린 1, 일고(제일고보) 1, 숙명 5명 등 총 26명에서 점차 늘어나 1937년에는 300명에 이르렀다.

당시 서울로 유학하는 학생들이 많았던 이유는 수원에 중등교육기관으로 고등보통학교와 고등여학교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수원지역의 학생들은 1930년대 후반까지 중등교육을 위해 서울로 유학을 하거나 기차를 이용해 통학을 해야 했다.

수원에 중등교육기관이 설립된 것은 1930년대 후반의 일이다. 수원지역 유지들과 학부모들이 끊임없이 고등교육기관 설립운동을 펼친 결과, 1935년 삼일학교에 고등과가 부설되었고 1936년에 공립 농업학교가 설립됐다.

따라서 1917년에 이미 수원학생친목회가 결성되어 있었고, 1920년 이선경을 비롯한 서울유학생들은 수원학생친목회나 기차로 통학하면서 서로 잘 알고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산루리 출신 박선태, 김노적 등과 독립운동하다.

수원의 대표적인 독립 운동가들은 산루리 출신이 많았고 일제 강점기 수원청년동맹과 수원노동조합도 산루리 101번지에 자리 잡고 있었다.

박선태와 김노적은 이선경이 자라난 산루리 사람들이다. 산루리는 번화한 상점과 관공서가 위치한 성안의 신풍리와 북수리, 남수리와 달리 팔달산 아래에 있었던 조선인 마을로 지금의 구천동과 중동일대다. 산루리 출신으로 김노적을 주목해야 하는데 그는 1917년 수원 상업 강습소를 졸업했다.

이때 강습소 소장이 김세환 이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3·1운동 당시 김세환을 도와 독립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 있었다. 김노적은 1919년 4월 1일 사립중앙고등고보에 입학하였고 1920년 7월 11일 수원 진명구락부 창립총회에서 도서부장으로 선출되었다. 이때 박선태가 운동부장 이었는데 박선태와 관련이 있었던 구국민단에도 일정하게 관여하였을 것으로 추정해 볼 수 있다.

김노적은 3·1운동시위를 주도한 혐의로 잡혀 심한 고문을 받았는데 이때의 상처를 성공회 신부들이 극진히 보살펴 준 인연으로 성공회에 가입하였고 이후 진명구락부에서 활동했다.

1920년 박선태, 이선경, 이득수 등의 구국민단 활동이 발각되었으나 동지들의 보안으로 체포를 피한 그는 중앙고보에서 퇴학처분을 받아 배재고보로 전학하여 1922년 졸업했다. 이후에도 김노적은 화성학원과 삼일학교에서 교사를 맡아 후진양성을 위해 활동했다.

또 다른 산루리 출신 인물로 박선태를 주목 할 필요가 있다. 휘문고보에 재학 중이던 그는 이종상을 만나 국내에서 항일투쟁을 펴기로 결심하고 1920년 6월 20일 임순남, 최문순, 최문순, 이선경 등 여학생들을 규합하여 비밀결사 구국민단을 조직했고 그는 단장에 선임됐다. 박선태는 구국민단 조직의 확대를 위해 활동하던 중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1921년 4월 2년형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렀다.

김노적과 박선태는 진명구락부 임원이었다. 1920년 6월 28일 남문 밖 성공회에서 발기인대회를 개최하였는데 명목상으로는 종교 활동이었지만 대회를 개최한 목적은 피압박민족의 자주독립운동에 있었다. 따라서 이선경이 박선태, 김노적 등과 연결되는 점은 세 명 모두 산루리 출신이라는 점과 함께 성공회 신도라는 요인도 작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3·1운동 당시 청주, 안성 등지로 비밀지령 전달

3·1운동은 민족적 정기가 충만했던 지식인 교사와 청년학생들이 이끌어 나갔다. 3·1만세운동은 기독교 측 민족대표 48인의 한 사람이자 삼일여학교(현 매향중학교)교사였던 김세환이 주축이 되었다.

수원상업강습소 교사 김노적을 중심으로 박선태(당시 20세), 이선경(당시 18세), 임순남(당시 18세), 최문순(당시 18세), 김석호, 김병갑, 이희경 신용준 등이 김세환의 시위계획을 듣고 함께 만세 시위에 참여했다.

이선경은 3·1운동이 일어나자 각지의 연락업무를 담당하였다. 그녀는 치마폭에 비밀문서를 숨기고 일본경찰의 눈을 피해 대전, 청주, 안성 등지로 수십차례에 걸쳐 비밀지령을 전달했다.

이것이 중요한 이유는 이들은 구국민단의 조직 구성원 이외의 인물들과의 연관관계를 파악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연결고리는 이선경의 순국과도 관련이 있다고 볼 수 있다.

1920년 8월 구국민단 사건으로 일제 경찰에 체포되어 1921년 4월 박선태와 이득수는 징역 2년형을, 이선경을 비롯한 임순남, 최문순 등 여학생들은 징역 1년, 집행유예 3년을 언도받았다.

이선경은 1920년 8월부터 1921년 4월까지 8개월의 구류기간에 심한 고문으로 병을 얻어 재판정에 나가지 못할 정도였다.

“판결 대정 9년 형공 제1492호, 이종상, 임순남, 최문순, 이선경, 박선태 상기 자들에게 대한 정치범죄 처벌령 피고 사건에 대하여 ‘피고 이선경은 궐석한 채로’ 조선총독부 검사 가토 기요마사 관여로 심리를 수행하여 판결함이 다음과 같다.”

자료출처-독립운동사 사료집 5: 삼일운동 재판기록

끝내 재판부는 이선경을 재판정에 세우지 못하고 궐석재판에 의해 형량을 선고했다. 이선경은 체포된 후 140일 동안 미결 구류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당시의 신문기사는 이선경에 대한 일제의 폭력적 고문이 있었던 사실과 재판 이후 이선경의 순국사실을 뒷받침하고 있다.


1921년 3월 21일

혈복단 공판연기

연기된 원인은 지금 감옥에 잇난 피고의 병기 때문

경기도 수원군 일형면 하광교리 이득수와 밋

동도동 군동면 남창리 박선태

동면 북수리 여학생 임순남

동면 남수리 여학생 최문순

동면 산루리 여학생 이선경

경성 종로통 이정목 이백칠십삼번지 윤익중 등이 “조선독립하기를 희망하고 독립을 선언할 목적으로(중략) 작일에 공판을 개정하려 하얏든바 우 혈복단 중 이득수와 밋 이선경 양명이 재감 중에 병이 잇서 법정에 출두하기 불가능함으로 다시 연기가 되얏는대 아즉 공판 기일은 정하지 안이하얏는 바 피고인의 병이 쾌한 것을 보아서 다시 공판 기일을 정할터이더라“

-혈복단 공판연기 기사, 조선일보 1921년 3월 12일.-

당시 변호사는 김우영이었는데 나혜석과 1920년 4월 10일 결혼한 인물이었다. 김우영은 변론에서 “피고의 행한일이 사회에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아니한 이상에 될수 있으면 무죄로 하고 유죄의 판결이 있더라도 집행유예 되기를 바란다.”고 변론하였다. 마지막 재판일은 1921년 4월 12일이었다. 이선경은 이날 방면되어 수원으로 내려왔다고 볼 수 있다.


일제의 모진 고문, 19세의 나이로 순국하다.

그러나 이선경은 옥중에서 풀려난 지 9일 만인 1921년 4월 21일 오전 8시 수원시 매산리 119번지에서 사망하였다. 사망 장소는 큰 오빠 이완성의 집으로 추정된다.

이곳에서 이완성의 셋째 아들 상래(1924년 생)가 태어난 곳이기 때문이다. 당시 이선경은 구류 8개월 만에 풀려나서 부모의 집인 산루리 470번지의 본가로 돌아가지 못한 것 같다.

이는 본가가 산루리에서 매산리로 이사하는 어수선한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이선경이 석방되던 1921년 당시 수원자혜의원이라는 큰 병원이 있었지만 집에서 죽음을 맞이할 정도로 병세가 심각한 상태였던 것이다.

‘석방되어도 다시 나라를 위해 싸우겠다.’고 당당하게 맞서던 이선경은 19세의 꽃다운 나이에 순국하고 말았다. 조국독립을 위해 희생한 이선경은 순국한 지 91년 만인 2012년 3월 1일 건국포장 애국장에 추서되어 독립유공자로 인정받았다.



참고문헌

- 박한, 수원사람들의 독립운동, 박물관에서 만나는 교과서속 사람들, 2015
- 수원, 수원사람들의 독립운동, 수원박물관, 2015
- 수원지역 여성과 3·1운동, 경기도 2008
- 이동근, 신작로 근대를 품다. 블루씨, 2016
- 한동민, 수원의 여성 독립운동가 이선경과 이현경, 수원역사 문화연구, 2011
- 한동민, 3·1운동 전후 수원의 여성운동과 삼일여학교, 수원지역 여성과 3·1운동, 2008
- ‘수원의 유관순 이선경을 아시나요’ 경기일보. 2011
- 수원박물관 홈페이지 관련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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