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혜석 가족사진, 1920년대. 왼쪽부터 나혜석, 남편 김우영, 친구 허영숙, 오빠 나경석, 동생 나지석

[경인종합일보 이승수 기자] 최초의 ‘여성화가’, ‘신여성’ 이란 수식어보다 앞선 ‘독립운동가’ 나혜석 <上>



나혜석의 나주나씨 가문은 조선 중기 수원지방에 터를 잡은 이래, 19시기 말에서 1900년대 초에 이르는 시기에 그 일족들이 지방관을 역임하고 경제적 부를 축적하여 신교육, 신문화운동을 선도적으로 이끄는 등 비교적 명문의 가계를 유지해 왔다.

나혜석은 이러한 나주나씨 가문으로 경기도 수원군 수원면 신풍리 291번지에서 1896년 4월 28일 출생했다. 그의 집안은 수원지역에서도 상당한 재력이 있는 집안이었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나혜석이 태어난 큰 가문의 오랜 기와집을 나 부잣집이라고 호칭할 정도였다.

나혜석의 부친 나기정은 1906년 10월 경기관찰도 주사에서 출발해 관직을 하기 시작했다. 그 뒤 1910년 8월 나라가 망한 뒤 나기정은 1910년 10월 1일 경기도 시흥군수로 임명되어 활동했다. 이어 1912년 3월 12일에는 용인군수로 부임하여 1914년 2월 28일 관직에서 물러났고 1915년 12월 10일 별세했다.

이것을 통해 보면 나혜석은 수원지역을 중심으로 한 상당한 재력가로 관료집안에서 태어났다고 볼 수 있다. 특히 그의 부친은 구한말의 관료로서 일제의 지배하에서 군수로 임명되어 활동한 현실에 순응한 인물이었다고 평가할 수 있겠다.

이러한 나혜석이 민족의식을 갖게 된 배경은 무엇일까. 그것은 동경 유학시절 이광수 등의 여러 사람들로부터도 물론 영향을 받았겠지만, 오빠 나경석과 약혼자 최승구의 영향이 가장 컸다고 생각된다.

 

경기도 화성시 봉담면 나씨문중 세거지 - 畵家 나혜석, 윤범모 작, 현암사


나혜석은 1910년 수원 삼일여학교를 졸업하고 그해 9월 1일 서울 진명여학교에 입학했다. 그리고 1913년 3월 28일 진명여자 고등보통학교를 최우등으로 졸업했다. 나경석은 이런 나혜석에게 1913년 동경여자미술전문학교에 진학하여 서양화를 전공하고 그녀가 예술가로 입신하기까지 직간접으로 많은 영향을 준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그러므로 나경석의 사상과 경향성이 나혜석에게 상당한 영향을 주었을 것으로 짐작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일 것이다.

나경석은 1910년 일본으로 건너가 동경에 있는 정칙영어학교(正則英語學校, 세이소쿠)에서 2년간 수학했고, 그 뒤 동경고등공업학교에 입학했다. 1914년 7월 동교를 졸업한 후에 귀국하지 않고 일본 대판에 있는 조선노동자들을 위한 활동에 참가했다. 즉, 나경석은 1910년대 중반 무정부주의자였던 장곡천시송(長谷川市松)과 생디칼리스트인 횡전종차랑(橫田宗次郞)을 매개로, 오사카지역 조선인 노동자의 생활에 대해 관심을 기울이고 있었다. 또한 나경석은 대삼영, 일견직조 등과 교제하여 더욱더 사회주의적인 경향을 지니게 됐다. 당시 나경석은 일본경찰에 의해 '배일선인'으로 주목받고 있었다.

한편 1915년 1월경 나경석은 오사카에서 조직된 재대판조선인친목회에서 총간사로 주도적인 활동을 전개하고 있었다. 이 단체는 친목도모나 노동자 구호보다는 노동자 규합이 주 목적이었단 단체였다. 그 당시 그가 쓴 '저급(低級)의 생존욕(生存慾)'에서 그는 자신의 소작지에서 일하고 있는 농민들을 동정하면서, 이러한 상황을 극복하는 방법은 "제너럴 스트라익, 사보타지. 이것이 그들이 자위 ·자존하는 유일방법이요, 삶의 진리지만 누가 '브 나로드'하면서 깃발을 높이 들 사람이 있겠소"라고 하여 지식인들의 역할과 사명을 강조했다.

즉 1910년대 중반 일본에서 유학했던 나경석은 당시 일본 사상계의 한 흐름인 초기 사회주의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생디칼리즘과 공산주의적 무정부주의를 지향했던 일본인 사회주의자들과 함께 대판에서 사회운동에 참여했던 것이다. 당시 일본에서는 일본의 산업화가 진전됨에 따라 노동문제, 부인문제, 폐창(廢娼) 문제 등 자본주의 사회가 추래한 문제 등에 대한 비판적 시각에서 많은 주의자들이 등장하고 있었다.

나혜석의 일본유학을 주선하고 나혜석에게 큰 영향을 주었던 인물인 나경석은 지금까지 검토한 바와 같이 초기 사회주의자였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일본에서 유학한 나혜석 역시 오빠를 통해 사회주의적 경향의 영향을 받았다고 생각된다. 아울러 '배일선인'이었던 오빠로부터 항일의식을 갖게 됐다고 보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일 것이다.

또한 나혜석의 약혼자였으며, 오빠 나경석의 친구이기도 했던 최승구의 영향 또한 컸을 것으로 짐작된다. 나혜석은 최승구가 사망하자 그의 죽음이 자신에게 끼친 파급효과를 그녀가 1934년 삼천리에 발표한 이혼고백장(離婚告白狀)에서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다


" 발서 옛날 내서 19세 되었을 때 일이외다. 약혼하였든 애인이 폐병으로 사거(死去)했습니다. 그때 내 가슴의 상처는 힘하야 일시발광이 됐고 연(連)하여 정신쇄약이 만성에 달하였습니다. "


즉 최승구는 나혜석의 약혼자였으므로 그의 죽음이 나혜석에게 미친 영향 또한 컸겠지만 그녀의 사상 형성에 최승구가 미친 영향 역시 컸으리라 생각된다.

최승구는 1892년 경기도 시흥 출신으로 보성중학교와 보성전문학교를 거쳐 1910년경 일본으로 건너가 경응대학 예과에 입학했다. 거기서 그는 사학을 전공하려 했으나 경제적 사정과 심한 폐결핵으로 예과 과정만 이수하고 귀국해 1916년 24세의 나이로 타계하고 만 것이다.

최승구는 일본유학시절 조선인 유학생들이 중심이 되어 조직한 학우회의 기관지인 '학지광'에서 인쇄인으로 중심적인 역할을 했다. 또한 '학지광'에 시 1편과 수필, 평론 등을 발표했는데 이를 통해 그의 사상적 경향을 살펴 볼 수 있다.

최승구는 '학지광' 5호에 실린 '너를 혁명하라!'라는 글을 통해 너와 나 우리 모든 개인의 혁명을 강조하고 있다. 이를 위해 우리 개인은 깨어 일어나 광선을 받고, 혁명을 해야 함을 강조하고 있다. 아울러 우이가 추구하는 바를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다. 즉,


저(這)의 절규는 우리로 하야금 송구스럽고 부끄럽게 한다. 보아라. 우리의 위치는 어하한 지점에 있나... 이들은 문명의 선에서, 더 나은 문명, 더 높은 문명을 요구함이어니와. 우리는 더 못한 문명, 더 얕은 문명의 선에 가기에도 전도(前途)가 상원(尙遠)하였고, 문명선 이내 - 제2의 출발점에도 아직 도달치 못하였다"


라고 하여 혁명하여 추구하고자 하는 바가 문명임을 나타내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문명된 사회에 도달하기 위해 10배의 속도로 질주해야 하며, "정의의 앞에는 공포가 없고, 확신의 앞에는 용기가 생기는 것이다"라고 주장했다. 즉 최승구는 조선을 비문명화된 사회로 보고 자신들을 혁명하여 문명화된 근대사회로 나아갈 것을 강조했던 것이다.

최승구는 강한 민족의식의 소유자이기도 했던 것 같다. 그가 '학지광'4호에 발표한 '벨지엄의 용사'에서 그의 민족의식의 일단면을 살펴볼 수 있다. 시의 내용으로 보아 제1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군에게 점령당했던 벨기에의 운명을 서술한 것이다. 최승구는 이 시에서 독일군의 점령하게 있었던 벨기에의 운명을 통해 식민지치하의 한국 민족의 비애와 울분을 토로하고 있다. 아울러 일제에 대한 강한 저항 의식을 은유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즉 그는 자신의 시에서,


벨지엄의 용사여!
최후까지 싸울 뿐이다.
너의 옆에
부러진 창이 그저 있다.

벨지엄의 용사여!
벨지엄은 너의 것이다!
네 것이면
꼭 잡어라!

벨지엄의 용사여!
너의 버디는 너의 것이다.
너, 인생이면
권위(權威)를 드러내거라!

벨지엄의 용사여!
창구(瘡口)를 부등키고 이러나거라
너의 피 괴이는 곳에
벨지엄의 자손 부러나리라

벨지엄의 히로여!
너의 몸 쓰러지는 곳에
거 누구가 월계관을
밧들고 섯을이라.(1914.11.3)


라고 하여 벨지움의 용사들에게 강한 저항을 요구하고 있으며, 끝까지 투쟁할 것을 주장하고 있다. 이러한 그의 주장은 당시 일제에 의해 강점당하고 있던 조선민족의 일제에 대한 저항을 주장한 것으로 생각된다.

즉 최승구는 근대지향적 인물이었을 뿐만 아니라 나경석과의 교유 등을 통하여 민족의식을 소유하고 있던 인물로 짐작된다. 그러므로 나혜석은 오빠 나경석과 약혼자 최승구를 통하여 보다 직접적으로 근대적인 의식과 민족의식을 소유한 인물로 변화·발전됐다고 생각된다.

 


나혜석은 1916년 최승구가 사망한 이후 김우영의 구애로 그와 사귀게 됐다. 그 역시 민족의식을 갖춘 인물이었으므로 나혜석의 민족의식 강화에 도움을 주었을 것이다. 경도제국대학 법과생인 김우영은 일제가 주시하는 활동적인 인물이었다. 그는 1915년 1월 24일 경도시내 대한청년회관 기숙사 안에서 자신의 주최하에 유학생 약 20명을 모아 경도조선유학생 친목회 조직을 위한 회의를 갖는 한편, 동년 3월 6일에는 다시 같은 장소에서 회칙을 협정하고 간부를 선출했다. 이때 김우영은 간사로 임명되어 회계 김시학, 서기 경석우등과 함께 활동했다.

또한 국내에서 3.1운동이 발발한 이후 3월 19일 일본은 여명회라는 단체를 조직해 일본에 거주하고 있는 한인들의 의견을 수렴한 적이 있었는데, 이때 김우영은 모든 한인이 자주 독립을 갈망하며 일본에 동화될 수 없다고 주장하는 등 항일적인 면모를 보여주고 있었다.

또한 김우영은 1920년 6월 수원에 연고를 두고 있던 박선태, 이득수, 이선경, 임순남 등이 구국민단을 주직해 활동하다 체포되어 재판을 받게 되자 변호사로서 피고가 행한 일이 사회에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아니한 이상 될 수 있으면 무죄로 하고 유죄의 판결이 있더라도 집행유예 되기를 바란다고 변론하는 등 항일운동에 대하여 긍정적 태도를 보였다.

이처럼 나혜석은 나경석, 최승구, 김우영 등과의 관계 속에서 민족의식을 고취시키고 발전시켜 나갔던 것이다.

 


<참고문헌 - 경기지역 3.1 독립운동사, 박환 作, 도서출판 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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