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도쿄시절의 나혜석(매일신보 1914.4.7) - 畵家 나혜석, 윤범모 作, 현암사

[경인종합일보 이승수 기자] 최초의 ‘여성화가’, ‘신여성’ 이란 수식어보다 앞선 ‘독립운동가’ 나혜석 <中>



나혜석은 일본 유학시절 여성해방운동에 관심을 기울이게 된다. 이점에서는 나경석과 최승구 등의 영향과 더불어 당시 일본에서 여성해방론이 주장되고 있었던 점 또한 크게 주목해야 할 것이다. 당시는 여성해방을 주장하던 잡지 '청탑(靑?)'(1911-1916)이 간행되어 사회의 주목을 받고 있었으며, 이 잡지 관계자 중에는 동경여자미술 전문학교 졸업생이 3명이나 있었다. 나혜석은 바로 이러한 일본 여성운동계의 분위기에 큰 영향을 받았을 것이며, 아울러 조선을 문명화된 근대사회로 만들어야겠다는 강한 의지를 갖고 있었을 것이다. 그 결과 나혜석은 '이상적부인'('학지광' 3호)등을 통해 여성해방론을 주장하게 됐던 것이다.

나혜석의 민족의식 형성은 그녀가 '학지광'에 발표한 글들 속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녀는 '학지광' 12호 '잡감(雜感)'에서


우리 조선여자도 인제는 그만 사람같이 좀 되바야만 할 것이 아니오? 여자다운 여자가 되어야만 할 것 아니오? 미국여자는 이성과 철학으로 여자다운 여자요. 프랑스여자는 과학과 예술로 여자다운 여자요. 독일여자는 용기와 노동으로 여자다운 여자요. 그런데 우리는 인제서야 겨우 여자다운 여자의 제일보를 밟는다하면 이 너무 늦지 않소? 우리의 비운은 너무 참혹하오 그래.


라고 하여 미국, 프랑스, 독일 여자등과 비교하며 조선여자도 이제 여자다운 여자가 돼야 함을 강조하고 있다. 즉 나혜석은 다른나라와 비교하며 조선의 자주적인 의식하에 여자다운 여자가 될 것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김우영 초상화(1920년경, 나혜석 作, 수원아이파크 시립미술관)


또한 나혜석은 '학지광' 13호에 실린글 잡감(雜感), K언니에게 여(與)함 에서도,


내가 여자요, 여자가 무엇인지 알아야겠소. 내가 조선사람이오. 조선사람이 엇더케해야 할 것을 알아야겠소.
이(二)는 자기소유로 만들려는 욕심이 있어야겠소. '수처작주(隨處作主)면 입처계진(立處皆眞)'이란 진리도 있소. 우리는 일시에 '지나(支那)'의 천자'天'자와 일본의 아'ア'자와 서양의 'A'자를 배우게 되었소. 우리가 항용(恒用)부르는 일본의 '야마도다마시이'가 무엇이오. 일본은 남의 문화를 수용(輸用)하되 일본화 하는 것이오. 일본사람은 외적 자극을 받아 가지고 내적 조직을 만드는 것이오. 우리도 배우는 학문을 내 소유로 만들어야겠소. 조선화시킬 욕심을 가져야겠소.


라고 하여 우리가 배우는 것을 조선화시켜야 함을 강조하는 등 조선인으로서의 자주의식을 보여주고 있다. 나혜석은 또한 소설 '회생한 손녀에게'('여자계')에서도,

그러면 너는 그 깍둑이 맛으로 회생한 너로 구나. 오냐 너는 죽기 전에는 그 깍둑이가 너의 정신을 반짝하게 해주는 인상을 잊을 내야 잊을 수 없게 되었구나. (중략) 너는 할 수 없이 깍둑이의 딸이다. 너도 인제 꼭 그런 줄을 알았을 줄 믿는다. 깍둑이로 영생하는 내 기특한 손녀여!


라고 하여 맛있는 서양식 빵, 스프 등 보다도 한국인들은 깍둑이와 같은 조선음식을 먹었을 때 참 정신이 나고 병도 완쾌된다고 하여 조선민족으로서의 강한 자긍심을 심어 주고자 했던 것이다. 즉 무조건적인 서구지향을 경계하며 민족적 자의식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1931년 제 10회 조선미술전람회와 제 12회 제국미술전람회서 입선한 '정원'


한편 나혜석은 1915년 4월 김정화 등과 함께 발기하여 조선여자 유학생친목회를 조직했다. 초대회장에는 김필례가 피선됐다. 이 단체의 설립목적은 재동경 조선여자 상호간의 친목을 도모하고 아울러 지식계발 및 국내여성을 지도 계몽하는 데에 있었다. 창립 당시에는 전영택과 이광수 등이 고문으로서 활동했다.

나혜석은 이 조직에서 이광수, 전영택 등과 함께 활동했는데 이들은 동경에서 조직된 조선학회의 중심 멤버였다. 이광소는 1916년 1월 29일 Y.M.C.A에서 개최된 제1회 총회 시 주최자로서 활동했다. 그리고 전영택은 1918년 1월 17일 김철수, 백남훈, 김도연 등과 함께 간사로서 활동했다. 이광수와 전영택이 활동한 조선학회는 1916년 12월 말 조도전 대학생 신익희 외 7명, 명치대학생 김양수, 장덕수, 최두선 등의 발기로 조직됐다. 설립목적은 조국에 관한 학술연구에 있으나 사실은 일종의 애국적 비밀 결사였다. 그러므로 이들의 자문을 받고 활동하던 조선여자유학생친목회 역시 항일적인 성향을 띠게 됐을 것이다.

조선여자 유학생친목회는 잡지 '여자계'를 간행하는 한편 기금 모집에 힘쓰며, 정기 연3회 또는 임시총회를 열고 시사에 관한 사항을 논의했다. 특히 시사에 관해 논의할 때 조선의 근대화문제, 제1차 세계대전 문제, 여성해방론, 민족문제 등이 논의됐을 것으로 짐작된다.

한편 나혜석은 1917년 10월 17일 동경 국정구(麴町區) 반전정(般田町) 조선교회당 내에서 개최된 임시총회에서 여자친목회의 총무로 선출됐다. 회장에는 김마리아, 서기 정자영, 부서기 김충의, 회계 현덕신 등이 선출됐다. 그리고 나혜석은 허영숙, 황애시덕 등과 함께 '여자계'의 편집위원으로 선출되어 편집부장인 김덕성을 보필했다. 그리고 이광수와 전영택이 편집찬조로서 '여성계'의 편집을 도와주었다. 즉, 나혜석은 여자유학생친목회 활동을 통하여 3.1운동 당시 함께 활동하게 되는 김마리아와 황애시덕 등과 긴밀한 관계를 갖고 있었다. 즉 김마리아는 회장, 나혜석은 총무, 황애시덕은 '여자계' 편집부원이었던 것이다.

나혜석은 1918년 3월 9일 오후 2시부터 국정구 판전정 조선연합기독교 교회 내에서 개최된 여자친목회 졸업생 축하회에서 회장 김마리아(여자학원생) 외 24명이 출석한 가운데 허영란과 김덕성 등과 함께 졸업소감 연설을 했다. 이어 잡지 '여자계' 제2호 발행 건을 협의했다. 사실 조선유학생여자친목회에서는 1917년 7월 기관지 '여자계' 창간호를 간행한 이후 경비문제로 휴간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이에 1918년 1월 나혜석은 전영택과 함께 적극적으로 학생들 사이를 오가며 간행기금을 호소한 결과 1918년 3월 하순 '여자계' 제2호를 발행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나혜석은 '여자계' 2호에 소설 '경희'를, 그리고 3호에 '회생한 손녀에게'를 각각 발표했다.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화가이자 문필가였던 나혜석이 1920년대 프랑스 파리에 머물며 근교 마을 풍경을 담은 유화 /사진제공=연합뉴스


또한 '여자계' 3호를 간행하는 데도 많은 찬조를 했다. 즉 그녀는 김덕성 15원에 이어 김자신, 최의향 등과 함께 5원을 기부했던 것이다. 그리고 구순선, 김충의, 정자영, 이양선, 오희영, 황애시덕 등은 각 3원씩을 기부했다.

즉 나혜석은 조선여자유학생 친목회의 주도적인 발기인이자 활동가였으며 또한 잡지 '여자계'의 편집, 집필, 찬조 등에도 중심적인 역할을 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여자계' 3호(1918년 9월 간행) '소식'에서도,


본지를 위하여 금옥같은 원고를 늘 쓰시고 본지의 유지와 발전을 위하여 참 분골쇄신으로 자기를 잊어버리고 헌신적으로 힘써 주시던 나창월씨는 졸업하신 후에 경성 진명여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일하시다 근일은 건강이 불량하여 익선동 자택에서 정양(靜養)중이시라는데 지금도 오히려 본지를 위하여 힘만히 쓰신다더라. 본지 동인은 그가 속히 건강이 회복하시기를 기원하나이다.


라고 하여 나혜석과 '여자계'가 긴밀한 관련을 맺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참고문헌 - 경기지역 3.1 독립운동사, 박환 作, 도서출판 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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