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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의 ‘여성화가’, ‘신여성’ 이란 수식어보다 앞선 ‘독립운동가’ 나혜석- 나혜석과 3.1운동
   
 

[경인종합일보 이승수 기자] 최초의 ‘여성화가’, ‘신여성’ 이란 수식어보다 앞선 ‘독립운동가’ 나혜석




1918년 3월 동경여자미술 전문학교를 졸업한 나혜석은 동년 4월 귀국하여 모교인 진명 여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일하다가 건강상의 이유로 익선동에서 요양을 했다. 이후 1919년 경성부 운니동 37번지 집에서 혼자 그림연구를 하고 있었다. 이러한 때에 동경에서는 유학생들을 중심으로 2.8독립선언이 있었고, 이때 조선여자 유학생친목회 회원들도 이에 가담해 활동했다. 즉 1919년 2월 재동경 남학생들이 결속해서 독립운동을 일으키자 여자들도 조국을 위해 나서서 일할 것을 결심하고 동회의 명의로 운동비 100원을 기탁하는 등 많은 성원을 보였다. 또한 국내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하기 위해 김마리아와 황애시덕 등 일부 회원이 귀국해 국내운동을 전개하고자 했다.

2.8독립선언에 참여한 조선여자 유학생친목회 회장 김마리아와 황애시덕은 이 사건을 계기로 경시청에 체포됐다가 풀려났다. 그 후 곧 김마리아는 국내에서 만세운동을 전개하기 위해 2월 15일에 부산에 도착했으며 2월 21일에는 서울에 도착했다. 서울로 올라온 김마리아는 1919년 3월 2일 일본 동경에서 조선여자 유학생친목회에서 함께 활동했던 나혜석을 만나 일본에서의 만세운동에 대해 이야기 하고 함께 활동할 것을 권유했다. 이에 동의한 나혜석은 김마리아와 함께 이화학당 기숙사 박인덕의 방으로 갔다. 그때 박인덕의 방에 모인 사람은 나혜석을 비롯하여 김마리아, 박인덕, 황애시덕, 김하르논, 손정순, 안병숙, 안숙자, 신체르뇨, 박승일, 안병수 등 모두 11명이었다.

나혜석과 함께 활동한 김마리아는 황해도 출신으로 조실부모하고 서울로 올라와 정신여학교를 졸업하고 모교의 교사로 재직했다. 1919년 당시 동경여자학원 학생이었다. 그녀는 1915년 5월부터 동경에서 유학했으며 기독교신자였다. 황애시덕(황애스터, 황신덕의 언니)은 평남 평양사람이다. 이화학당을 졸업하고 평양 숭의 여학교 교사로 근무하던 그녀는 1913년 비밀결사 송죽(松竹)결사대를 조직했다. 8세 때 부터 기독교를 믿은 그녀는 1919년 당시 동경여자의학전문학교에 유학중이던 학생이었다. 1919년 1월 6일 동경 신전 조선청년회관에서 김마리아, 노덕신, 유영준, 박정자, 최청숙 등과 함께 독립운동에 대하여 논의했으며 2.8독립선언 이후 국내에서 활동하기 위해 2월 28일 동경에서 귀국했다.

즉 동경에서 2.8독립선언에 참여한 김마리아 황애시덕 등이 귀국해 여성들을 중심으로 한 만세운동을 추진하고자 했던 것이다. 이에 김마리아는 일본에서 함께 활동한 나혜석에게 협조를 요청했고, 나혜석이 이에 동의했던 것이다. 이들 3인은 동경에서 조선여자 유학생친목회의 주요 간부였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었지만 같은 기독교 신자라는 공통점 또한 갖고 있었던 것이다. 나혜석은 소학교 때부터 기독교를 믿었는데 1917년 12월 동경의 조선교회에서 조선인 목사에게 세례를 받았다.

 

 

함께 모임에 참여한 사람들 중에는 이화학당 교사와 학생 그리고 졸업생이 대다수였으며, 기독교 신자들이 다수를 이루고 있었다. 이점은 황애시덕이 이화학당 졸업생이며 기독교 신자였던 점과 관련이 있는 것이 아닌가 한다. 즉 운동의 구성원 조직에 있어서는 황애시덕의 영향력이 크게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박인덕은 이화학당 교사였다. 출생지는 평남 진남포이며, 1916년 3월 이화학당을 졸업하고 그해부터 이화학당 교원으로 영어, 수학, 체조, 음악, 재봉, 성서를 가르치고 있었다. 박인덕은 나혜석을 3월 2일의 회합 이전부터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는 기독교 신자로 6세부터 신앙하여 9세 때 진남포에서 세례를 받은 인물이었다. 손정순은 이화학당 학생으로 대학교 1학년 혹은 2학년생이었고, 안병숙은 중앙 교회당 유년부 선생이었다. 안숙자는 경성부 서린동 100번지에서 출생했고 이화학당 중학과를 1918년에 졸업했다. 남편은 일본 육군 보병 중위 염창섭으로 당시 12사단 소속이었고 시베리아에 출정 중이었다. 김 하르논과 박승일은 이화학당 선생이었다. 신 채르뇨도 1917년부터 이화학당 선생으로 일했으며 어릴 때부터 기독교 신자였다.

나혜석 등 11명이 모인 가운데 김마리아는 어제 남학생들이 먼저 독립운동을 시작했는데 여자 쪽은 어떻게 하면 좋겠는가라는 의견을 제시했다. 이에 대해 황애시덕은 다음과 같이 3가지 안을 제시했다. 첫째 부인단체를 주직해 조선의 독립운동을 전개할 것, 둘째 남자단체와 여자단체와의 사이에 연락을 취할 것, 셋째 남자단체에서 활동할 수 없을 때에는 여자단체가 그것을 대신하여 운동할 것 등이었다.

이에 대해 나혜석은 첫째 안과 둘째 안에 찬동을 표했다. 이어 활동 자금 문제가 논의됐고 나혜석 등은 자금은 개개인이 마련하자고 결의했다. 아울러 김마리아의 제안으로 이 단체를 영구히 지속화시키기 위해 회장을 선출하자고 제의했다. 그리고 향후계획은 3월 4일에 다시 모여서 구체적으로 논의하기로 하고 헤어졌다. 한편 그들은 이날 모임에서 각 학교가 휴교할 것, 3월 5일 남학생들의 독립운동에 가담할 것 등을 결의하고 박인덕과 신준려 등이 학생들을 동원하기로 했다.

이에 나혜석은 3월 3일 오후 8시경 자금 조달을 위해서 자신과 연고가 있는 개성과 평양으로 출발했다. 개성에서 나혜석은 정화여숙(貞華女塾) 교장인 이정자를 방문했다. 나혜석이 그녀를 방문하게 된 것은 이정자의 질녀가 경성의 여자고등보통학교에 다니고 있었는데 나혜석과 이웃에 살고 있던 인연 때문이었다. 그녀에게 지금 경성에서 여자단체를 조직해 독립운동을 하기로 되어 있으니 만약 개성에서 그런 일이 있으면 통지하고 연락을 취해달라고 말했다. 이에 이정자는 그 뜻에는 기본적으로 동의하지만 교장으로서 참가할 수 없다고 했다.

이어 나혜석은 평양으로 향했다. 평양에서는 정진(貞進)여학교의 선생인 박충애를 찾아 방문했다. 그녀는 나혜석과는 수원 삼일학교 동창생으로 같은 반이었고, 서로 1등을 다투었다고 전해진다. 박충애는 이화학당을 졸업하고 강원도 원주 감리교회 부속국민학교에서 교원으로 일했으며, 일본에 유학하여 요코하마(橫濱)에 있는 여자신학교를 다녔다. 한편 박충애의 어머니는 나혜석의 삼일학교 은사이기도 했다. 귀국 후 박충애는 평양에서의 만세운동에 참여한 바 있었다. 나혜석은 이러한 박충애에게 독립운동에 참여할 것을 요청했다. 이에 그녀는 현재 관헌의 주목의 대상이 되어있으므로 가능한 대로 참여하겠다고 했다.

이처럼 나혜석은 3월 2일 모임 이후 3월 3일 저녁 개성과 평양으로가 직접 조직과 자금을 마련하고자 진력했다. 이점으로 보아 3.1운동 당시 나혜석은 독립운동에 적극적인 인물이었음을 짐작해 볼 수 있다.

3월 4일 아침에 경성으로 돌아온 나혜석은 3월 8일 황애시덕을 통해 자신이 이 조직의 간사가 됐다는 사실을 알았다. 당시 3월 4일 모임에서 간사로 선출된 인물은 김마리아, 황애시덕, 박인덕, 나혜석 등이었고 박인덕이 학생 쪽을 담당하기로 했다. 이 결의에 따라 3월 5일 이화학당의 식당에서 아침식사 때 신려준과 박인덕이 학생들에게 만세를 부르도록 지도했다. 이 사건으로 인해 나혜석은 김마리아, 황애시덕, 박인덕 등과 함께 일경에 체포되어 3월 18일 경성지방검사국에서 심문을 받았다. 그 결과 투옥됐다가 김마리아 등과 함께 동년 8월 증거불충분으로 면소됐다.

 


그 후에도 나혜석은 계속 민족의식을 갖고 활동했다. 그리하여 1923년 3월의 의열단 사건 또는 황옥(黃鈺)경부 폭탄사건에 나혜석은 부군 김우영과 함께 직간접으로 협조했다. 특히 위험부담이 컸던 이 사건에서 폭탄과 권총을 숨겨주고, 또 체포됐던 의열단원 유석현이 출소한 후 보관해 두었던 권총을 돌려줄 정도로 나혜석은 민족의식을 갖고 있던 인물이었던 것이다. 특히 의열단원이었던 유석현이 '한국경제신문' 1986년 11월 6일자 '잊을 수 없는 사람들'에


"소위 '의열단 사건'으로 나를 비롯한 많은 동지들이 옥중생활을 했을 때, 그의 부인 나혜석씨는 우리를 찾아와 건강을 걱정해주고 민족을 회생기키기 위한 용기를 복돋워 주는 일을 잊지 않았다. 또 그러한 정신적 격려를 바탕으로 민족을 위한 동지들의 결의가 더욱 굳어졌음은 물론이다"


라고 언급하고 있는 점을 통해서도 그녀의 민족의식을 짐작해 볼 수 있다. 그러나 3.1운동 이후 그녀의 민족의식은 점차 쇠퇴했던 것으로 보인다. 우선 특별한 민족운동을 전개하지 않았으며, 그녀의 삶 속에서 남편 김우영이 일본관료로서 일했다는 것에 대해 고민한 흔적이 보이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구미여행 중에 식민지고급관료들과도 인적교류를 갖고 있었으며, 조선총독부와 밀접한 관련을 갖고 내선일체 정책에 적극적이었던 오사카의 사업가 류원길병형과도 친분을 쌓고 있었던 것이다. 즉 그녀의 관심은 민족과 독립에 대한 열망에서 차츰 자신의 생활 범위에 한정되어 간 것으로 볼 수 있다.


/참고문헌 - 경기지역 3.1 독립운동사, 박환 作, 도서출판 선인

이승수 기자  leonardo79@nat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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