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교헌 선생 /사진제공=독립기념관

[경인종합일보 이승수 기자] 대종교의 교주이자 독립선언서에 가장 먼저 서명한 인물 ‘김교헌’


한국민족운동사에서 대종교가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은 간과할 수 없는 역사적인 사실이다. 대종교는 단군신앙을 바탕으로 한 민족종교로 일제침략에 대항한 항일투쟁에서 괄목할 만한 업적과 성과를 남겼다. 또한 한민족독립운동의 구심체로서 역할을 했고 대부분의 독립운동 지도자들이 대종교 교도였다는 사실만 보아도 대종교가 독립운동선상에서 차지하는 위상을 가히 짐작할 수 있다. 1919년 4월 상해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될 당시 의정원 의원 29명 중에서 대종교 원로가 21명이었고, 의장에 선출된 이동녕과 정부조직에 임명된 13명 중 11명이 대종교 원로였다. 대종교 제2세 교주 김교헌의 생애와 독립운동가로서의 업적을 정리해본다.


- 명문거족의 후예로 태어나 관직을 두루 역임하다

김교헌은 1867년 7월 5일 경기도 수원군 구포리 외조부 조희필의 집에서 부친 김창희와 모친 풍양 조씨 사이에서 4형제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백유(伯猷), 호는 무원(茂園), 당명은 보화(普和)이며, 대종교에 입교한 후 이름을 외자 헌(獻)으로 바꾸었다.

선생은 명문거족의 후예로 수원에서 출생해 서울에서 성장했다. 그의 7대조 김주신(1661~1721)은 숙종의 장인이며, 아버지는 공조판서 김창희이고 어머니는 풍양 조씨로 판관을 지낸 조희필의 딸이다. 자택은 영조때 왕자궁으로 쓰였던 340칸 대저택을 하사받은 것인데, 김교헌이 집안의 종손으로서 독립운동을 위해 전 가산을 처분한 뒤 보성학교와 명성여자실업학원(現 동국대 사대부고)을 거쳐 조계사에서 인수해 오늘에 이른다.

선생은 18세 되던 해인 1885년 정시문과(庭試文科) 병과(丙科)에 급제했고, 그 후 권지부정학(權知副正學)·예조참의(禮曹參議)·예문관검열 겸 춘추관기사관·성균관전적·홍문관부교리·시강원문학·홍문관응교·수찬·성균관대사성·승정원좌부승지 등을 역임했다.

 

독립선언문


- 독립협회, 만민공동회, 조선광문회에 참여하다

1898년 독립협회에 가입해 민중계몽운동을 전개했고, 개혁내각 수립과 의회개설운동이 좌절되어 17명의 독립협회 지도자가 구속되자 대표위원으로 선정되어 만민공동회 운동을 전개했다. 1903년에는 문헌비고찬집위원(文獻備考纂輯委員) 편집위원이 됐다. 그가 다양한 서적을 섭렵하고 지식을 넓힐 수 있는 기회를 가진 시기는 1903년 문헌비고찬집위원 활동에서이다. 김교헌이 5년에 걸쳐 완성한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1908)’는 상고시대부터 대한제국 말기에 이르기까지 우리나라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군사 등 각종 제도와 문물을 정리한 책이다. 1906년에는 동래감리 겸 부산항재판소 판사와 동래부사로 재직했다. 김교헌이 항일의식을 고취하게 된 결정적 계기는 1906년 동래감리 겸 부산항재판소 판사와 동래부사로 재직할 때였던 것으로 여겨진다. 통감부의 비호 아래 자행된 일제의 경제침략에 맞서서 이권운동을 징계하여 다스리다가 일본인들의 횡포와 친일파 송병준의 모함으로 해직됐다. 해직된 후 비밀결사단체인 신민회(新民會) 회원과 교유 관계를 맺었으며, 조선광문회에 들어가 현채·박은식·장지연 등과 함께 고전간행사업에 중추적인 역할을 했다.

다시 복직되어 1909년에는 규장각부제학으로서 국조보감감인위원 가선대부까지 승진했다. 선생은 규장각부제학으로서 ‘국조보감’감인위원을 겸직했는데, ‘국조보감’은 조선시대 역대 왕의 업적 가운데 선정(善政)만을 모아 후세의 왕들에게 교훈이 되도록 편찬한 편년체 역사책이다.


- 대종교에 입교하여 저술을 통해 우리 민족사의 정통성을 체계화하고 민족주체사관을 정립하다

1909년 1월 15일(음력) 나철·오기호·이기 등이 중심이 되어 서울 제동에 모여 단군교를 ‘중광(重光, 교문이 다시 열림)’했다. 단군교 중광에 참여한 인사로는 강우·최전·유근·정훈모·김인식·김윤식 등 수십명으로 주로 나철과 함께 대일외교항쟁을 전개한 인사와 을사오적 처단의거에 참가했던 인사들이 대부분이다. 다음해인 1910년 8월 5일 ‘대종교’로 교명(敎名)을 바꾸고 포교활동을 통한 구국운동에 매진했다. 나철은 국권회복을 위한 새로운 방략으로 한국 고유의 민족종교를 창시하고, 자주 독립 사상을 고취하여 이를 통해 구국운동을 전개하고자 했다.

선생은 1910년 경술국치를 당하자 대종교에 입교했는데 대종교인으로서의 훌륭한 자질을 갖추었고 그의 관직경력 등으로 제1세 교주인 홍암 나철의 각별한 신임을 받았다. 선생은 입교 다음해인 1911년 총본사 요직을 거쳐 도사교위리(都司敎委理)의 중책을 맡아 4년간 직무를 수행했다. 유근과 함께 ‘단군의 사적을 살핀다’는 뜻의 단군 기록 모음집인 ‘단조사고(檀祖事攷, 1911)’ 편찬을 주도하기도 했다. 1914년에 남도본사 전리, 1915년에 남도본사 도강사 및 전강 등 중책을 맡으면서 종리(倧理)와 종사(倧史)를 연구하던 중 1914년 ‘신단실기(神壇實記)’와 ‘신단민사(神壇民史)’를 저술했다.

신단실기는 대종교 종리에 관한 것인데, 이는 처음 이 교의 교명이 단군교(檀君敎)인 것처럼 단군을 종조로 내세워 민족종교의 교리와 단군사를 밝힌 것이다. 이는 일제에 나라는 강탈 당했으나, 우리에게는 유구한 민족의 시조가 있고 민족사가 있으며 민족의 고유한 종교가 있다는 것을 밝히고자 한 종교서인 동시에 민족혼을 일깨우는 국사서이다.

 

신단민사


신단민사는 ▲상고(上古) - 신시시대, 배달시대, 부여시대, 종교, 제도, 문학기예, 풍속 ▲중고(中古) - 열국시대, 남북조시대, 종교, 제도, 문학기예, 풍속 ▲근고(近古) - 려요시대, 려금시대, 고려시대, 종교, 제도, 문학기예, 풍속 ▲근세(近世) - 조선시대, 종교, 제도, 문학기예, 풍속 등으로 나누어 시대구분을 했다. 김교헌의 신단민사의 시대구분중에서 목차 중 근고에서 요금(遼金)도 포함시켰다는 것은 만주를 지난날의 역사에서 우리 영역 즉 구강(舊疆)으로 보았던 것이다. 또한 민족사의 정통성을 강조하고 체계화했다.

이 두 저서는 우리의 건국 시조인 단군과 대종교를 연결시켜 그 연원(淵源)을 역사적으로 규명했고, 이는 우리 민조사의 정통성을 체계적으로 세워 종래의 사대주의 사상을 불식하고 민족주체 사관을 정립하는데 크게 이바지했다. 그의 학문은 후에 박은식·신채호의 민족사학에도 크게 영향을 끼쳤다. 최남선도 그에게 사사(師事)했고, 김교헌이 중국으로 망명한 후 그의 서적 대부분을 최남선이 소유하고 있었으나 현재는 고려대학교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참고문헌 - 이달의 독립운동가 생애와 공적, 국가보훈처

저작권자 © 경인종합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