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길림성 화룡시 용성향 청호촌 청호종산에 위치한 백포 서일, 홍암 나철 무원 김교헌의 묘

[경인종합일보 이승수 기자] 대종교의 교주이자 독립선언서에 가장 먼저 서명한 인물 ‘김교헌’


- 대종교 제2세 교주로 취임하여 교세를 넓히다

김교헌은 1916년 9월 1일 나철의 뒤를 이어 대종교의 제2대 도사교(都司敎:교주)에 취임했다. 그러나 1915년 ‘대종교 포교금지령’이후 국내에서의 대종교 활동은 거의 불가능했다. 일제는 1915년 10월 1일 조선총독부 제령 제83호로 ‘포교규칙’을 발포(發布)하고 대종교를 종교가 아니라 독립운동단체로 규정하고 탄압했다. 선생은 나철이 순교한 다음해인 1917년 3월 일제의 탄압을 피해 만주 화룡현 대종교총본사로 망명했다. 망명 후 선생은 교단 정비와 교세 확장을 주도하고 항일무장투쟁을 추진했다. 동시에 교단 하부조직인 46개소의 시교당(施敎堂)을 설치하고 민족학교를 설립하여 민족교육에도 심혈을 기울였다.

1922년 종경회(倧經會)에서 ‘신고강의’·‘신리대전’·‘회삼경’·‘신사기’·‘조천기’·‘신단민사’·‘신가집’ 등 7종의 교적을 간행했다. 이어 시교회(施敎會)에서 성손금(誠損金)을 모금하여 교경(敎經)을 간행했다. 이듬해인 1923년에는 종경회에서 ‘종리문답’·‘중정신가집’·‘증책종례초략’·‘국한문삼일신고’·‘신리대전’ 등을 검정한 후 시교회에서 ‘국문현토신고강의’·‘신리대전’·‘신사기’·‘회삼경’·‘국한문신단민사’·‘배달족강역형세도’ 등을 간행하여 이를 바탕으로 포교활동과 교세확장에 이바지했다. 그중에서도 김교헌의 ‘신단민사’와 이원대의 ‘배달족강역형세도’는 대종교종인 뿐만 아니라 당시 독립운동지도자를 양성했던 사관학교 학생들은 물론 재만한인사회에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교재로 널리 사용됐다.

김교헌이 대종교 제2세 교주로 재임한 시기인 1916년~1923년까지 신자수가 30만명을 넘었다. 당시는 대종교 전성기로 급속한 교세확장과 교인으로서의 자부심도 대단했다. 김교헌과 함께 대종교 교세 확장에 크게 기여한 인물은 바로 서일(徐一)이다. 1919년 김교헌이 서일에게 교통을 전수하고자 했으나 항일무장투쟁에 매진하기 위해 5년간 교통 전수를 유보했다.

 

동경성 대종교총본사터


- 대한독립선언서에 제일 먼저 서명하고 주도하다

1919년 2월 대종교 제2세 교주 김교헌 등 39인의 명의로 만주 길림에서 대한독립선언서(大韓獨立宣言書, 일명 무오독립선언서)가 선포됐다. 발표일자는 ‘단군기원 4252년 2월 ○일’로 되어 있다. 대한독립선언서의 발표주체는 만주지역 항일무장단체인 대한독립의군부이다. 선언서 내용에 ‘단군대황조’가 언급되어 있고 발표장소도 대종교총본사인 것으로 보아 대종교와 깊은 관련성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또한 대한독립선언서에 서명한 인물 39인 중에서 이세영·한흥·최병학·이승만·김약연·이대위·황상규·안창호 등을 제외한 대부분의 인사들이 대종교 중심인물들이다. 선생은 대한독립선언서에 가장 먼저 서명하며 주동적인 역할을 했다.

대한독립선언서는 모두 35행 1,725자로 되어있다. 선언서에서는 우선 “대한민주의 자립을 선포하노라”라고 하여 민주공화제에 기반을 둔 근대적인 국가를 건설해야 한다고 서두에서 밝히고 있다. 이어서 외세의 지배는 절대로 받을 수 없다는 강력한 의지를 표방하고 세계각국에 대해 소위 ‘한일합방’이 무효임을 강조했다.

국내에서의 3.1운동 소식이 전해지자 선생은 1919년 3월 24일 안도현(安圖縣)에서 대종교도들과 함께 만세시위에 참가했으며, 안도현 덕수동 자신의 집을 방문한 대종교도와 학생 50여명과 함께 독립운동 대책을 논의했다.

 

청산리전투


- 만주지역 항일무장투쟁을 지도하다

1919년 10월 대종교 교인을 중심으로 구성된 대한군정서(大韓軍政署, 일명 북로군정서)가 조직되어 총재에 교단의 지도자인 서일, 부총재 현천묵 등이 중심이 되어 적극적인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했다. 대종교 제2세 교주 김교헌 선생은 1920년 10월 홍범도·김좌진 등이 청산리대첩에서 승리를 거둘 수 있게 지도했다. 대한군정서는 서일이 대종교인들을 중심으로 1911년 3월 중광단을 조직해 1919년 5월 대한정의단(大韓正義團)으로 발전시킨 후 길림군정사(吉林軍政司)와 연합했다. 대한정의단은 1919년 10월 군정부(軍政府)로 개편했다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명령에 따라 대한군정서로 명칭을 변경하고 본격적인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했다.

청산리대첩에서 대패한 일제는 대대적인 병력으로 독립군을 추격했다. 서일은 동포들의 희생을 최소화시키고 장차 연해주로 이동하기 위한 전략으로 대한군정서를 중국과 러시아의 국경지역인 밀산(密山)으로 이동했다. 1921년 자유시참변으로 독립군이 막대한 타격을 입고, 다시 밀산에서 재기를 도모하던 중 서일이 순국했다. 선생은 1922년 청산리대첩 이후 흩어졌던 대종교도들을 모아 본부를 밀산에서 영안현(寧安縣) 영고탑(寧古塔)으로 옮겨 대한군정서를 재건하고자 했다.

 


- 영안현 대종교본사 수도실에서 56세의 나이로 순국하다

청산리대첩에서 대패한 일제는 대종교도들을 무차별 학살하는 만행을 저질렀는데 당시에 희생당한 대종교도들만도 수만명에 달했다. 그 뒤 일본군의 탄압을 피해 대종교총본사를 영안현으로 옮겨 선도포교사업(宣道布敎事業)을 통한 구국투쟁에 진력했다. 1923년 ‘신단민사’를 출간해 민족의식을 고취했다. 그러나 만주 전역에 걸친 일본군의 토벌작전으로 독립운동 및 교단의 기반이 크게 약화되고 서일의 죽음으로 큰 충격을 받아 병을 앓다가 1923년 11월 18일 영안현 남관(南關) 대종교총본사 수도실에서 윤세복에게 교사교(교주)의 지위를 물려준다는 유서를 남기고 56세의 나이로 순국했다. 1977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됐다.



/참고문헌 - 이달의 독립운동가 생애와 공적, 국가보훈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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