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인종합일보] [독자기고]‘장재성’을 독립유공자로!


지난해 11월 3일 3·1운동, 6·10만세운동과 함께 3대 항일운동으로 꼽히는 광주학생독립운동 89돌을 첫 정부행사로 격상돼, 학생들이 지켜온 정의가 더 이상 ‘잊혀진 역사’에 묻히지 않도록 위상이 높아졌다.

최근 (사)광주학생독립운동기념사업회는 "학생독립운동의 출발점이 광주였다"며, "그 정신을 이어받아 3·15광주의거, 5·18광주민중항쟁으로 연결됐다"고 밝혔다.

이어 "주역인 장재성(張載性, 1908~1950) 선생을 비롯한 많은 분들이 여전히 독립유공자가 되지 못하고 있는데다, 중형을 선고받았던 분들의 인물전이나 평론집은 찾아보기 어려운 실정이다"고 덧붙이며,

"100주년을 10년 앞두고 있는 만큼, 장기계획을 세워 실천해 역사를 복원하고 계승하는 환경을 조성해 나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사업회는 아직까지 서훈을 받지 못하고 있는 학생독립운동 참여자들에 대해 독립유공자 신청 사업에 적극 나설 것을 촉구하는 한편, 참여했던 학교의 구체적인 활동 내역에 대해 조사할 것 등도 요청했다.

당시 광주학생운동에 앞장서서 일명 ‘광주학생독립운동의 아버지’로 불리는 광주고등보통학교(광주고보, 현 광주일고) 교사 운인(雲人) 송홍(宋鴻) 선생도 1967년 교정에 선생의 동상이 세워져 있는바, 독립유공자로 선정되길 바란다.

학생들의 힘으로 억압과 불의에 맞서 지켜낸 정의, 항일의 불길을 지핀 역사를 재조명하는 각계의 노력과 더불어 보훈, 교육 당국이 중심을 잡고 이를 수렴하고 지원해야, 항일운동의 실질적인 위상을 당당히 바로 세울 수 있을 것이다.
전남 나주역에서 일본 중학생들이 한국인 여학생을 희롱한 데 격분한 광주고보 학생들이 일본인학교 학생들과 충돌한 것이 도화선이 돼, 나흘 뒤 일왕생일 행사를 계기로 '조선독립만세', '식민지 노예교육 철폐', '일제 타도' 등을 외치는 항의시위로 이어졌고, 이는 전국적인 항일운동으로 확산됐다.

그런데 이날은 몇 가지를 함께 의미하는 날이기도 하였다. 일본으로서는 일왕 메이지의 생일인 메이지절[明治節]이었고, 우리 민족으로서는 마침 음력 10월 3일로 개천절[開天節]이었으며, 광주학생들의 독서회원들에게는 전신인 성진회(醒進會) 창립 3주년이 되는 날이었다.

광주학생운동의 지도적 역할을 담당한 학생결사 성진회는 항일·반식민지·민족독립이라는 한민족 공통의 대국적 상황을 학생의 처지에서 집약한, 그리고 광주학생계의 현실에서 조직된 결사체로 1926년 11월 3일 조직되었다.

다음해에 독서회로 확대, 개편되면서 광주고보·광주농업학교·광주사범학교·광주여자고등보통학교(광주여고보, 현 전남여고)·목포상업학교 등에 하부 조직을 두고, 김기권과 장재성은 학생소비조합을 만들어 자금 조달에 노력하였다.

하지만 광주학생독립운동은 해방 이후 독재정권에서는 평가절하 돼 위상이 떨어지는 등 정권의 입맛에 따라 부침이 심해, 역사적 평가나 정신계승 사업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

일제강점기에서 해방된 지 8년 만인 1953년 11월 3일 ‘학생의 날’로 제정됐지만, 독립운동기념일에선 빠지면서 뒤늦은 조명도 반쪽짜리였다.

1960년대 학생의 날은 학생군사훈련 수단으로 악용됐고, 유신정권은 1973년 학생시위를 우려해 아예 폐지했다. 군부정권 시절인 1984년 학생의 날로 다시 살아났지만, '독립운동'이라는 명칭이 빠져 의미가 퇴색됐다.

2006년에서야 비로소 ‘광주학생독립운동기념일’로 제 이름을 찾았다. 전국적인 행사로 열렸던 기념식은 1959년 광주에서 열린 30주년 기념식 이후 ‘광주만의 행사’로 전락했다.

이제 기념일의 위상이 제자리를 찾은 만큼 실질적인 가치 재평가와 독립유공자 발굴이 시급하다. 초등학교 교과서에서 고작 네 줄짜리 기술에 그쳐있는 광주학생독립운동의 역사성과 의미를 재평가해, 교육과정에도 적극적으로 반영해야 한다.

학계에서는 식민지 차별교육 철폐와 언론·집회·결사·출판의 자유 보장, 사회과학 연구의 자유 등을 일깨운 독립운동이라는 점에 주목한다.

박찬승 한양대 교수는 ‘전남지방 3.1운동과 광주학생독립운동’ 연구논문에서 “1920년대 말 신간회 운동을 비롯해 노동, 농민운동이 침체된 분위기에서 전체 민족해방운동을 다시 고양시켜주는 계기가 됐다”고 평가하기도 했다.

유공자 발굴은 정부가 나서서 더욱 실질적인 작업을 통해 속도를 낼 필요가 있다. 일단 보훈처는 2018년 첫 정부기념식을 계기로 6명의 학생독립운동 유공자를 발굴했고, 기념식에서는 후손이 확인된 고(故) 조아라·윤오례 여사 등 3명에 대해 포상했다.

이계형 국민대 특임교수는 “독립유공자 전체 규모에서 광주학생독립운동 관련 훈포장 수여자 규모가 극히 작고, 선정됐어야 할 분들이 누락됐다”며, “훈격도 형평성이 맞지 않는 등 평가가 적절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이 교수에 따르면, 현재 정부가 선정한 독립유공자는 모두 1만 4879명인데, 광주학생독립운동 관련 훈포장 수여자는 212명이다. 광주학생독립운동 동지회 회원 227명 중에서도 훈포장을 받은 인물은 69명에 그쳤다.

90주년이 되는 광주학생독립운동에 걸맞게 기념사업의 중장기 계획이 필요한 시점이다. 더불어 전국적으로 350여개로 추산되고 있는 학생독립운동 참여 학교 협의회 결성 등 관련 사업들을 다양하게 발굴하고 추진해나가야 한다.

특히 학술적인 부분의 체계적인 정리를 비롯해 유네스코 등재 준비를 위한 기록물 수집 사업, 근대 사적지 복원 등이 절실하다. 1968년 건립된 광주학생독립운동기념회관에는 운동 참여자 판결문 1139개와 유공자 기록부, 인물기록 등을 보관하고 있다.

광주학생독립운동기념회관 측은 “학교 급에 맞춘 만화 제작, 사적지 탐방, 정신계승협의회 운영 활성화, 기념관 전시시설 재구성 등 다각적인 노력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2017년 8월 문재인 대통령은 보훈처 업무보고 당시 "3대 독립운동 중 하나인 광주학생항일운동은 동문회 주관행사로 전락해, 정부관계자가 참석도 하지 않고 있다"고 지적한 터다.

이후 정부는 지난해 10월 30일 심의 의결된 ‘각종 기념일에 관한 규정’의 개정안에, 광주학생독립운동기념일의 주관부처를 교육부에서 교육부·국가보훈처 공동으로 바꾸는 내용을 담으면서, 명실상부한 국가기념일로서 자리매김하게 됐다.

1. 광주학생운동[光州學生運動]

1919년 3·1운동과 1926년의 6·10만세운동 뒤 일제는 반일적 사상운동과 사회 운동, 그리고 학생운동 등 한국 민족의 대대적인 반격과 도전에 직면하고 있었다.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한 좌파에 대한 탄압이 확대됨으로써, 일제에 대한 민족 저항세력은 새로운 방향에서 재편성의 기운을 보이기 시작하였다.

신간회는 1927년 2월 15일 조선중앙기독교청년회(YMCA) 회관에서 발기되었다. 같은 해 5월 16일 좌파들은 속칭 874개 단체 대표들을 모아 조선사회단체중앙협의회 창립대회를 열었고, 5월 27일에는 신간회의 자매단체인 근우회(槿友會)가 창립되었다.

특히, 일제당국은 3·1운동의 민심 수습책의 하나로 1면 1교 계획(보통학교)을 4년 내 달성할 것을 공포했으나, 10년 뒤인 1928년 현재 전국 2,400여 면에 공립·사립 보통학교가 도합 1,544개가 있을 뿐이었다.

차별적이고 제한적인 식민지교육 상황에서 한국인 학생들은 항일민족운동을 전개했다. 1928년도엔 83건의 항일학생운동이 전개되었다.

1928년 4월경 광주와 송정리 등에서 항일 격문을 뿌린 사건에 연루된 광주고보 학생 이경채 등 8명이 공판에 회부되었다. 그가 『조선독립선언문』의 작성과 살포에 가담하였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광주고보생들은 1928년 6월 동맹휴교운동에 들어갔다.

1929년 3월 광주고보 학생 김몽길·여도현 등이 교규문란의 이유로 퇴학을 당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어 광주학생동맹휴교 1주년이 되는 6월 26일 5학년을 비롯하여 2·3학년 학생들이 수업을 거부하고 하학하는 사태가 일어났다.

1929년 10월 30일 오후 5시 반경 광주발 통학열차가 나주에 도착하였을 때였다. 이날 나주역에서 통학생들이 집찰구로 걸어 나올 때 일본인 학생 몇 명이 광주여고보 3학년 학생 박기옥.이금자.이광춘 등의 댕기 머리를 잡아당기면서 모욕적인 발언과 조롱을 하였다.

그때 역에서 같이 걸어 나오고 있던 박기옥의 4촌 남동생이며 광주고보 2학년생인 박준채 등이 격분하여 이들과 충돌하였다. 그때 출동한 역전파출소 경찰은 일방적으로 일본인 학생을 편 들며 박준채를 구타하였다.

이에 광주고보 학생인 최희선.김보섭 등 10여 명이 박준채와 합세하여 한·일 학생간의 대결이 계속되었으나, 더 이상의 큰 충돌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러나 11월 1일의 광주역 사건으로, 당일 통학생도 아닌 일본인 중학 5학년 학생 4, 5명이 광주고보의 정세면에게 도전해 옴으로써, 한·일 학생간의 충돌 사건이 다시 일어났다.

11월 2일 하학 열차에는 양교 교사와 경찰이 동행하였으며, 아침에는 전라남도지사가 양교 교장에게 통학생들에 대한 엄중한 감독을 지시한 바 있었다.

1929년 10월 30일 이후 고조되어 가던 광주고보를 비롯한 광주학생들의 대일 항쟁심은 '독서회중앙본부'의 적극적인 활동으로 하나로 뭉쳐져, 1929년 11월 3일 대항일 학생운동으로 전개될 수 있었다.

11월 3일 오전 11시경 우편국 앞에서 신사참배를 하고 돌아오던 16명의 일본인 중학생들과 광주고보의 최쌍현 등 사이에 충돌이 일어나 그가 광주중학교 학생의 단도에 찔려, 코와 안면에 부상을 당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광주고보 학생들과 광주농업학교 학생 일부가 '조선독립만세'를 외치고 운동가를 고창하며 행진해 나갔다. 가두 행동대가 충장로와 우체국을 거쳐 도청 옆의 상품진열관부근에 이르렀을 때, 그곳에 있던 광주사범학교 학생 100여 명의 호응을 받았다. 또, 광주여고보 학생들 일부가 행동대에 가담하였다.

광주학생들의 호응 속에 숫자가 불어난 가두 행동대는 도립병원 앞으로 나와 다시 광주중학교 습격을 시도했으나, 경찰·소방대 등의 완강한 방어에 부딪히게 되었다. 그러나 행동대는 계속 함성을 지르고 일전불사의 기세로 시위를 했으며, 연도의 군중은 이들의 결연한 항쟁을 지지, 성원하였고, 일본인 상인들은 폐점 상태에 들어갔다. 행동대는 가두에서 강력한 제지와 해산명령 등을 아랑곳하지 않고 금동을 지나 광주고보로 돌아왔다.

1929년 11월 3일 전개된 광주학생의 제1차 가두투쟁은, 오전의 투쟁이 부분적 투쟁이라면 오후의 투쟁은 전체적인 투쟁이다. 동맹휴교투쟁에서 실력투쟁을 거쳐 집단적 가두투쟁의 단계로 발전시킨 광주 학생들의 새로운 대일항쟁의 장이 벌어진 것이다.

11월 3일 밤 도당국은 광주중학교와 광주고보 양교에 대해 3일간 임시휴업을 지시하고, 학부형과 학생들에게 다각적인 선무책을 강구하도록 했으나 실효가 없었다. 이에 다시 3일간의 휴업을 더 연기하여 11월 11일부터 수업을 재개하기로 하고, 일면탄압·일면선무의 양면책을 썼다.

한편, 11월 3일 가두 투쟁에서 39명의 광주고보 학생과 1명의 광주농업학교 학생이 구속되었다. 일제 측의 이러한 탄압은 항일학생들의 항쟁심을 꺾기보다는 오히려 학생들이 보다 발전된 차원에서 대일항쟁을 전개할 수 있도록 하였다.

11월 3일 사태 이후 광주 청년계에 영향력을 가졌던 장석천·장재성·강석원 등은 시내 금동에 '학생투쟁지도본부'를 설치하고 광주학생투쟁을 항일민족운동의 전국화라는 방향으로 확대, 발전시키기 위하여 각기 지도업무를 분담하였다.

장석천은 광주 및 전국 학생의 행동지도, 장재성은 광주학생 행동지도, 국채진은 전라남도 내 지방학생의 지도, 박오봉은 직공 및 노동단체의 지도, 임종근은 전라남도 내 공립보통학교 교사와의 연락, 강석원은 외래동지와의 연락, 나승규는 운동자금 조달을 각각 담당하였다.

11월 12일 오전 10시 치밀한 준비 작업 끝에 격렬한 항일 격문이 요소요소에 뿌려졌으며, 광주고보 학생들은 우체국에서 대인동으로 진출하여 함성을 지르며, 여자고보의 참여를 촉구했다. 그러나 이미 광주여고보 학생들은 교실 내 감금 상태에 있었기 때문에 참가하지 못하였다.

이때부터 경찰의 대대적인 탄압이 가해져, 광주고보와 광주농업학교의 가두 행동대 주류는 일제히 구속되어, 도청 앞에 있는 무덕전에 수감되었다. 당일 광주사범학교 앞에서 광주고보 학생 190여명과 광주농업학교 학생 60여명이 검속되었다.

이날 검속된 학생과 11월 3일 직후 검속된 학생들은 성진회·독서회 그리고 광주학생관계 등으로 분류되어, 공판에 회부되었다.

12일 항쟁 이후 광주고보는 300여명을 무기정학 처분하고 임시 휴업에 들어갔으며, 광주농업학교에서도 항쟁에 참가한 학생 전원을 무기정학 처분하고 임시 휴학의 조처를 취하였다.

1,000여 명이 되는 광주고보·광주농업학교·광주여고보·광주사범학교 등 광주 시내 중학교 학생 대부분이 항쟁에 참여하였는데, 일제는 이 가운데 170여 명을 광주형무소에 투옥시켜 공판에 회부하였다. 광주고보의 검속학생 총수는 12월 17일까지 247명이며, 그 중 55명은 구속, 192명은 석방되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학부형들이 당국과 협의, '학생의 면학과 학부형의 보호 감독 철저' 등을 요지로 하는 굴욕적인 서약서를 제출한 뒤에, 겨우 12월 10일 개교할 수 있었다.

1930년 1월 9일 2학기의 시험이 시작되자 4학년 이하 학생들 모두가 백지동맹으로 항거하자, 학교 측은 이에 맞서 선동자로 지목된 17명을 또 퇴학 처분하였다. 14일에 일어 난 백지동맹에 가담한 244명의 학생을 3일간 자택에서 근신하도록 하고, 15일에는 10일의 백지동맹 주동자 48명을 퇴학 처분하였다.

광주학생의 항일의지는 목포·나주·함평 등으로 번졌고, 드디어 서울학생의 궐기를 촉구하였다. 뿐만 아니라, 전국으로 확대되었다.

먼저 목포상업학교에서는 11월 19일 '피감금학생 즉시탈환', '총독폭압정치 절대반대' 라는 기치 아래 시위를 전개하다 36명이 검속되었고, 72명이 무기정학과 근신 등의 처분을 받았다. 그리고 27일에는 나주농업보습학교와 나주보통학교에서도 독자적으로 항일시위가 있었다.

신간회(新幹會)의 영향이 컸는데, 중앙본부의 간부이며 변호사인 김병로와 허헌, 서기장 황상규 등이 광주학생항쟁운동의 진상을 조사하기 위하여 광주에 다녀와서 진상을 보고하자, 한용운·조병옥 등이 중심이 되어 민중운동을 준비하였다.

그러나 12월 9일 서울 학생들의 궐기로 12월 13일 예정했던 신간회의 민중운동은 경찰의 탄압으로 실패하였다. 이때 조병옥·권동진·한용운 등 신간회 회원 44명과 근우(槿友)·청총(靑總)·노총(勞總) 등의 관계자 47명이 검거되었다. 또한, 중앙청년동맹·조선학생과학연구회 등에서도 광주의 진상조사를 하였다.

이와 같이 신간회와 청년단체·학생단체에서 광주사태에 대하여 '진상 조사'라는 명목으로 적극적인 개입과 지원운동을 전개하였다.

드디어, 1929년 12월 2일 밤과 3일 새벽 사이에 경성제국대학을 비롯한 주요 공립·사립학교와 시내 요소에 광주학생운동의 전국화를 위해 학생과 민중의 총궐기를 촉구하는 격렬한 격문이 살포되었다.

경찰은 종로경찰서에 수사총본부를 설치하고, 4일 정오까지 각 사상단체·청년단체·근우회의 간부와 학생 등 127명을 검거하고 조사에 나섰다. 5일 아침에도 40여명을 더 검거하였다.

그리고 12월 5일 경성제이고등보통학교에서는 '학우회의 자치', '조선역사의 교수', '광주학생에 대한 응원', '식민지교육 반대' 등을 내용으로 하는 진정서를 제출하고 교내 시위에 들어갔으며, 7일에는 경성제일고등보통학교가 교내 시위를 했다.

그 뒤 같은 취지로 경신·중동·보성·중앙·휘문·협성실업·숙명·근화·배재학교 등이, 11일에는 이화·여자상업·동덕·실천여학교·경성농업학교·법정학교·고등예비학교·전기학교·선린상업학교 한국인 학생 등이 광주학생 지원을 위해 분기하자, 배화·진명·중앙보육·정신·간이상공 등의 각 학교는 휴학을 선언하였다.

그러나 1930년 1월 개학하자, 항일운동은 다시 시동되었다. 1월 15일 보성전문학교를 비롯한 고등보통학교·여자고등보통학교 학생 등 서울학생들은 광주학생 지원과 일제의 살인정책을 규탄하고, 성토·시위·동맹휴교 등을 단행하였다.

서울학생의 항일운동은 곧 전국적으로 확산되어 참가한 학교 194개, 학생 수 5만 4,000여 명이었으며, 퇴학 처분자 582명, 무기정학 2,330명, 피검자 1,642명으로 이 운동은 3·1운동 이후 최대의 대일민족항쟁이었다.

광주학생의 항쟁은 일본 제국주의의 타도를 통한 민족의 독립과 이 길을 위해 식민지교육 체제를 반대하고, 민족교육을 주창하며 궐기한 민족독립항쟁인 것이다.

반일선상의 상식을 조직성과 집단력이 강한 학생층이 체계적으로 분석하고 구체적으로 비판하고자 하였는데, 민족차별과 식민지교육 체제, 여기에 대한 '민족독립의 필요성'은 부각되는 것이다.

특히 광주지역에는 이미 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성진회가 창립되어, 민족독립의 성취를 위한 이론을 다양하게 연구하여 대일항쟁요원을 육성, 조직한 점이다.

2. 광주학생독립운동 기념

광주학생독립운동과 관련된 역사적 사료를 보관·전시하는 곳으로 광주광역시 서구 화정동 512번지에 있다. 1967년 광주광역시 동구 황금동에 광주학생독립운동기념회관을 운영하다가, 공간이 협소하고 노후 되어 2004년 현 위치에 기념관을 신축하고, 2005년 11월 새롭게 문을 열었다.

광주광역시교육청 소속 기념회관에는 당시 학생독립운동 참여자 판결문(1천 1139건)과 유공자 기록, 인물 관련 기록(284건), 언론보도 내용 등을 보관한 전시관이 있다. 그러나 광주학생독립기념회관, 광주교대, 광주자연과학고 등에 건립된 광주학생독립운동기념탑은 모양은 물론 건립 년·월·일 등이 각기 다르다.

장세윤 동북아역사재단 수석연구위원은 “1929년 11월 3일 광주에서 촉발된 이 운동이 전국과 해외로 파급된 대규모 독립운동인 점을 감안, 그 정신과 의미를 지속적으로 반추·추모·계승·교육해 활용해야 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또 “광주학생운동이 실상에 비해 별로 부각되지 못한 주요 원인 중 하나는 조선총독부 관헌들의 과장과 진상왜곡 때문”이라며, “당시 사회주의자들의 활동을 새롭게 검토하고 반영하는 시각과 방안을 강구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이어 “연구 성과를 일반 시민이나 학생 등 대중에게 보급하기 위한 노력이 필요하다는 지적을 유념해야 한다”며, “관련학자와 연구자, 교육자들이 꾸준한 관심과 노력을 기울여, 연구 교육할 수 있는 자세와 연구교육 환경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그는 이와 함께 “학술연구도 전국 200∼300여개 학교가 위치한 각 지역에서의 연구는 부진한 상황”이라며, “각 지역의 자료와 유물, 유적을 발굴해 연구 기초자료를 확보하는 작업도 매우 중요하다”고 역설했다.

그는 “정부와 지자체는 주체적으로 ‘광주’가 아니라 해당 지역에서 전국으로 확산됐던 학생독립운동을 기념하기 위해, 법규 재정비와 기념시설·사업을 과감히 민간에 위탁해야 한다”며, “시민과 학생, 전문가들의 노력과 참여가 뒤따라야 한다”고 말했다.

기념회관이 학생독립운동 90주년을 맞아, 전국 시도 학생대표와 해외 학생 등 360여 명이 참여하는 ‘전국청년학생문화예술축전’을 광주광역시 일원에서 11월 2일과 3일 개최한다.

학생독립운동 전국화 사업의 일환으로 추진되는데, ‘독립에서 평화로-평화, 교류로 열다’를 주제로 학생독립운동을 통해 전국 시도 학생대표들이 만남으로 소통하고, 교류하는 축제의 장이 마련된다.

전국 시도 학생대표방문단들이 집결해, 광주학생독립운동기념탑 참배, 청소년독립페스티벌, 방송사 연계 문화예술 공연, 90주년 정부기념식 행사 참석 등으로 진행된다.

또한 참가 시도 학생대표단은 당시 참여 학교인 광주일고와 전남여고를 방문해 학생기념탑과 여학도기념비 참배 등 학교역사관을 둘러볼 예정이다. 기념회관은 9월 30일까지 시도교육청별 학생 20명 내외와 인솔교사 1~2명을 추천받아 전국 학생대표 방문단 명단을 확정했다.

기념회관이 10월 31일 오후4시 광주학생교육문화회관 공연장에서 ‘90년 전의 함성, 전국을 넘어 통일로’라는 주제로 ‘제6회 학생독립운동 90주년 기념음악회’를 개최한다.

학생이 중심이 되고 참여하는 행사추진을 위해 관내 중고등학교 학생문화예술동아리 단체의 참가신청을 받아, 선정된 경연공연 7개팀과 특별공연 3개팀 등 총 10개팀 249명이 참여하는 학생참여형 공연으로 진행된다.

또한 헌정음악회가 지난 10월 27일 오후 5시 빛고을시민문화관에서 열렸다. ㈔광주학생독립운동기념사업회가 주최하는 이번 음악회는 학생독립운동에 참여한 선열들을 추모하고, 시민들이 숭고한 정신을 계승하는 것을 목적으로 했다.

학생독립운동정신계승 민관협의회는 관련조례에 따라, 학생독립운동 정신계승 사업의 효율적 운영을 위해 지난 2018년부터 광주시·시의회·시교육청·광주지방보훈청 등 10개 유관기관·단체가 참여하는 협의체로 구성·운영되고 있다.

보훈처가 지정한 사적지는 옛 광주역터(현 동부소방서), 광주 토교 터(현 대인시장 동문다리 입구), 4개 학교(현 광주일고 터, 현 전남여고, 전 광주농업학교 터, 전 전남사범학교 터), 김기권 문방구 터(현 금남공원) 등이다.

또 광주시에 광주학생독립운동 유적지를 연결하는 1103번 시내버스 신설을 요구했다.

3. 장재성(1908~1950)을 독립유공자로!

광주학생독립운동은 1929년 11월 3일 광주에서 학생들의 항일시위가 벌어졌고, 그 후 학생들이 핵심적 역할을 하고 신간회·조선청년총동맹·조선학생전위동맹 등 사회·청년단체들이 가세하여 조직적으로 전개되었다.

11월 3일은 광주고보 학생들이 조선독립을 추구하고 식민지 교육체제에 반대하며, 비밀결사조직(성진회)을 꾸린지 3년째 되는 날이었다. 그런데 운동의 최고 지도자 장재성은 독립유공자로 인정조차 받지 못하고 있는 모순적 현실은, 해방 74주년을 지낸 지금도 지속되고 있다.

이 시절 장재성은 광주지역 중등학교에서 최초 학생비밀결사인 사회과학연구모임 ‘성진회’를 결성하고, 광주학생독립운동 총책 역할을 맡았다.

1929년 10월 30일 나주역에서 광주여고보 학생들을 밀치고 지나간 광주중학교 소속 일본인 학생들과 이를 목격한 광주고보 학생들 간 충돌이 벌어진 뒤, 11월 3일에 광주고보 학생들이 광주중학교로 몰려갈 무렵, 장재성은 이 시위운동을 직접 지도한 것으로 알려졌다.

당시 광주에는 광주고보ㆍ광주농업학교ㆍ전남사범학교ㆍ광주여고보 등 대부분의 학교에 비밀독서회가 조직돼 있었다. 독서회의 전신은 1926년 11월 장재성·왕재일 등이 지도했던 성진회(醒進會)였는데, 회원 중 1명의 친형이 일본 경찰관이었던 탓에 비밀누출 위험이 있어, 결성 5개월 만에 해산됐다.

이후 일본 주오(中央) 대학으로 유학을 떠난 장재성은 1929년 6월 대학을 중퇴하고 광주로 돌아와 학생사회과학연구모임의 조직화에 나섰다. 이렇게 만들어진 것이 독서회중앙부이며, 각 학교에서는 독서회를 조직해 중앙부와 상호 긴밀한 연계를 맺어 활동했고, 장재성은 최고 중심인물인 책임비서를 맡았다.

장재성은 청년연맹 상무집행위원장인 장석천 등과 시위운동을 전국으로 확산시키고자 노력했고, 2차 시위 이후 260여명의 학생들과 함께 구속된 장재성은 광주지방법원에서는 7년 형을, 대구 항소심법원에서 4년형을 선고 받았다. 광주학생독립운동 관련자 중 최고형량이다.

장재성은 4년간의 감옥생활을 마치고 나온 이후에도, 1939년 '적색교원 사건'으로 일경에 다시 체포돼, 징역 1년에 집행유예 3년을 언도받기도 하는 등 일제강점기 내내 비타협적으로 일제에 맞서 싸운 대표적인 독립운동가였다.

11월 3일을 ‘학생의 날’로 기념하게 된 배경인 1929년 광주학생운동 주역인 장재성은 4·19혁명 뒤 민주당 정부가 3.1절을 앞두고, 백범 김구를 비롯해 독립유공자에 대한 대대적인 표창을 시작한 1962년 당시, 최초 표창대상자 208명의 명단에 포함돼 있었지만, 곧바로 '해방 후 조선공산당에 가입한 사실이 확인됐다'면서 서훈 취소가 발표돼, 결국 최종 표창대상자 명단(205명)에서 제외되고 말았다.

장재성은 해방정국에서 여운형의 건국준비위원회 전남지부 조직부장, 광주청년동맹 의장, 민주주의민족전선 결성대회 전남대표 등으로 활동했다. 그는 분단에 반대하여 세 차례에 걸쳐 남과 북을 오가며 활동했다.

1948년 대한민국 정부가 정식으로 수립된 직후, 검거된 장재성은 징역 7년형을 언도받았고, 광주교도소에서 복역 중 한국전쟁이 일어나면서 법적 근거도 없이 이승만 정권에 의해 총살당해야 했다.

지난 2005년 3·1절에 여운형 등 사회주의계열 독립운동가 54명에 대한 포상이 이뤄졌고, 국가보훈처는 지난해 12월 ‘일제강점기 학생이 독립운동에 참여해 퇴학을 당한 경우’를 유공자 포상 기준으로 추가해, 3·1운동 100주년 및 항일학생운동 90주년이 되는 올해 학생운동 계열 독립유공자 포상에 포함시킬 방침이다.

문재인 대통령은 8월 15일 제74주년 광복절을 맞아 광주학생운동의 도화선이 된 댕기머리 고 박기옥 당시 광주여고보 학생 등 독립유공자 178명에게 포상했다.

정부는 11월 3일을 '학생독립운동기념일'로 정하였고, 국가보훈처는 2018년 첫 정부기념식을 계기로 6명의 학생독립운동 유공자를 발굴했으며, 기념식에서는 후손이 확인된 3명에 대해 포상했다.

현재 정부가 선정한 독립유공자는 모두 1만 4879명인데, 광주학생독립운동 관련 훈포장 수여자는 212명이다. 광주학생독립운동 동지회 회원 227명 중에서도 훈포장을 받은 인물은 69명에 그쳤다.

1929년 광주학생독립운동은 일제강점기 3.1혁명, 6.10만세운동과 더불어 3대 대중운동의 하나로 높이 평가받고, 국립서울현충원 애국지사묘역의 조길룡(1909~1991)등 동료들은 독립운동가 묘역에 안장돼 있다.

그런데 당시 언론에 대문짝만한 사진과 함께 최고 지도자로 지목되면서, 대구복심법원에서 가장 높은 형량인 징역 4년형을 언도받았던 장재성은, 국립현충원에서 그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다.

최근 한반도를 향한 일본의 경제침략으로 50대 이상 중 장년층은 물론 10대 이하 어린 학생들까지 나서 일본 불매운동 나서는 등 사회 전반에 극일(克日) 감정이 고조되고 있는 가운데, 과거 일본에 항거한 어린 독립운동가들의 업적이 다시 한 번 재조명 되고 있다.

일제 식민통치에 반발한 학생들의 민족의식이 폭발하면서 시작된 학생독립운동은, 현재 어린 학생들이 표출하고 있는 ‘극일 감정과 유사하다’는 점에서 동질감마저 느껴지고 있다.

장재성은 1945년 8월까지의 활동을 고려하면 명실상부한 독립유공자였기에,
‘북한정권 수립에 기여’하지 않았지만 사회주의 운동을 했다는 이유로 독립유공자로 인정받지 못했으나, 광주학생독립운동기념 90주년과, 광주고보 개교 100주년 맞이하는 이 시기에 명예와 자긍심에 의거 실현되어야 한다.

광주시교육연수원 신봉수 역사교사는 “장재성 선생은 성진회와 독서회 중앙부 등 맹휴투쟁(盟休鬪爭)의 주역이었으며, 광주학생독립운동 총책이었던 지도자였음에도 불구하고 사회주의자라는 낙인으로 아직까지 독립유공자 서훈을 받지 못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4. 운인(雲人) 송홍(宋鴻, 1872~1948)을 독립유공자로!

1929년 11월 3일 당시 광주고보 교사 송홍 선생은 광주학생독립운동에 앞장서서 일명 ‘광주학생독립운동의 아버지’로 불리는 인물로, 문집으로는 <운인유고(雲人遺稿)>가 남아 있다.

'민족운동총서' 8집 '학생운동'(민족문화협회.1980)과 '전라남도지'(전남도.1956)는 그를 '광주고보 학생들이 민족의식을 자각하고 독립투쟁에 앞장선 것은 송홍 선생의 영향력이 절대적이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선생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역사를 가르치며 학생들의 민족의식을 일깨웠고, 이런 선생의 노력이 학생들의 항일의식을 키우는 데 큰 영향을 미쳤다는 것이다.

화순에서 태어난 송 선생은 1905년 을사늑약 체결 때 고종에게 부당성을 상소하고,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동포에게 보내는 격문을 지어 일본 헌병에게 쫓기다, 미국으로 망명했다.

고국으로 돌아온 선생은 광주고보에 재직하면서, 일본인들의 눈을 피해 한국 역사를 가르치며 학생들에게 민족의식을 고취시켰다. 1929년 11월 3일 광주지역 학생들이 일제 침략에 맨주먹으로 맞섰던 광주학생독립운동의 이면에서 선생의 영향이 절대적이었다.

기록에는 많은 제자들이 검거, 구속, 퇴학 처분으로 수모를 겪는 것에 마음 아파하던 그가 1930년 2월 19일 '초야로 돌아가며 제군에게 주는 글'이라는 한 편의 시를 남기고 교단을 떠났다고 전한다.

"내 일찌기 가르침을 새롭게 하려다 / 오늘 아침 여러분과 더불어 이별하는 / 말 한 마음으로 스물 두해 봄이었으니 / 강호에 늙어가는 병인 질 것이 없네".

송 선생은 공산주의자였던 자식들이 월북하면서 선생까지도 '빨갱이'로 몰렸고, 이로 인해 그분에 대한 사실은 잊혀지도록 강제된 것 같다.

선생은 1948년 6월 향년 76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고, 유해는 고향인 전남 나주시 남평에 묻혔으며, 1967년 후학들에 의해 광주 북구 누문동 광주일고 교정에 선생의 동상이 세워졌다.

그의 항일정신과 겨레사랑을 기려 제자들은 1967년 11월 2일 광주학생독립운동기념탑 앞에 흉상을 건립하고 선생을 추모하고 있다.

운인 송홍선생 문집발간위원회 김성인 회장은 “일제의 회유와 탄압에도 굴하지 않고 민족의 얼을 후학에게 가르친 참스승의 모습을 다시 생각하는 뜻 깊은 행사를 갖는다”며, “광주학생독립운동과 선생의 위상이 재조명되는 계기가 되기 바란다”고 말했다.

5. 친일 교가 교체

광주일고는 지난 1월 ‘교가를 작곡한 이흥렬이 친일 인사였다’는 사실을 확인한 후, 교가 교체작업에 나섰다. 앞서 광주 광덕중·고와 대동고가 같은 이유로 친일 잔재교가를 새 교가로 교체했다. 금호중앙여고, 숭일고 등 광주지역 13개 학교에서도 올해 안에 ‘친일 교가’ 교체작업을 마무리 짓기 위해 서두르고 있다.

’광주학생독립운동의 산실’ 광주일고 ‘친일 교가’ 교체작업이 막바지다. 학교 측은 10월께 학교의 정체성을 담은 새 교가를 완성해, 오는 11월 3일 ‘광주학생독립운동기념일’에 최종 발표한다는 방침이다.

광주일고 새 교가는 ‘임을 위한 행진곡’을 작곡한 김종률씨와 교내 공모를 거쳐 선정된 재학생 4명이 공동으로 작사·작곡 중이다. 새 교가에는 ‘광주학생독립운동 발상지’라는 학교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내용을 담았다. 멜로디는 경쾌하고 리듬감 있는 곡으로, 학생들이 따라 부르기 쉽게 했다.

학교의 공식 상징인 교가를 지은 이가 친일반민족 인사라는 것을 알고 있는 학생들이 얼마나 될까? 그것을 알고도 그 노래를 자랑스럽게 부를 수 있는 학생은 또 얼마나 될까? 아니, 자기가 목청껏 불러온 그 교가를 친일파가 지었다는 것을 알고도 그 노래를 교가로 부르고 싶을까?

광주지역에서 시작된 ‘친일잔재 교가 교체’ 물결은 서울과 경기도, 충청, 울산, 제주 등 전국적으로 퍼진 상태다.

교육청이 우선 어느 학교에 얼마나 친일인사가 지은 교가가 존재하는지 실태조사부터 해야 한다. 그리고 그것을 바꿀지 말지에 대해서 해당학교의 교육주체들과 시민사회가 합리적 토론을 거쳐 교육적 결론을 낼 수 있도록 지도해야 한다.

당장 할 수 있는 것은 당장 하고, 당장 할 수 없는 것은 장기적인 계획을 세워서 일제잔재 청산작업을 해야 한다. 실용적 가치와 역사적 의미 퇴색, 경제적 부담 등의 이유로 당장 없앨 수 없거나 없앨 필요가 없는 것들도 있을 수 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그 역사적 의미를 따지고, 토론을 해 나가는 과정 자체가 살아있는 역사 교육이다.

한편 내년이면 개교 100주년을 맞는 광주일고가 총동창회장으로 김상곤(43회) 전 교육부장관·사회부총리를 선임하고, 대대적인 문화적 사업을 펼치는 중이다. 김 회장은 2월 취임사에서, 100주년을 맞은 모교의 재학생들에게 정신적 지표가 될 100주년기념홀 등 총동창회가 주축이 되어 추진할 문화적 사업 구상을 밝혔다.

현 기숙사 공간에 들어설 예정인 100주년기념홀에는 일제강점기 교육자이자 항일운동가인 송홍 선생 등 자랑스런 은사와 동문들의 흔적을 전시하고, 세미나실과 연극 공간 등 문화동아리 공간을 만들어 문화적 소양을 키우는 곳으로 활용할 계획이다.

100주년 역사서 발간과 광주학생독립운동에서 5.18민주화 과정까지의 내용을 담은 책을 한강 작가에 의뢰하고, 이를 뮤지컬로 탄생시켜 무대에 올리는 방안도 추진되고 있다. 동문인 김종률씨 등과 함께 작업할 계획이다.

광주 서중·일고총동창회는 개교 99주년을 맞는 올해는 백범 기념사업회와 함께 재학생들을 초대해 독립과 민주화 포럼을 개최했다.

4월에는 광주시민과 고려인이 함께하는 3.1운동 100주년, 광주학생독립운동 90주년 기념 학술대회를 광주 광산구 고려인마을에서 진행하고, 광주 학생과 고려인 학생 각 10명씩과 함께하는 연해주 독립운동 현장 탐방도 실시했다.

9월에는 러시아 블라디보스톡에서 열리는 국제마라톤대회에 재학생과 함께 참여하며, 독립유적지를 방문했다. 11월 3일 학생독립운동 90주년을 맞아서는 올해로 53년째를 맞는 동문음악회인 무등음악제와 전시회, 포럼, 동문 등반대회 등을 마련한다.

한편 100년간 4만 명의 동문을 배출한 광주 서중·일고 총동창회는 내년 100주년문화사업 추진에 필요한 운영기금을 동문들이 나서 십시일반 마련 중에 있다. (2019. 10. 27)
저작권자 © 경인종합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