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양주= 오공석 기자] 250년 전 화길옹주가 살던 궁집… 조선시대 숨결 느낀다

남양주 궁집(南楊州 宮집)
국가민속문화재 제130호 지정
조선시대 전형적인 사대부가
상류 사회의 유고 의식 담겨
안채와 사랑채, 행랑채로 구성
사계적 색다른 풍경으로 선사
늦둥이 화길옹주 19세 요절에
팔순 잔치도 미룬 왕의 사연

정원으로 들어가면 참새가 짹짹 재잘대며 탐방하는 시민을 반긴다.

개망초는 들판을 이루듯 여기저기서 자태를 뽐내고 있다. 느티나무, 단풍나무, 귀쿵나무, 물박달나무 등 낙엽활엽수의 그늘이 지면을 넓게 덮고 있어 시원한 바람풍을 낸다. 각종 나무 향기는 머리를 깨끗하게 할 만큼 향기롭게 코끝을 스치게 하는 특별한 궁집이 있다. 이른 봄에는 목련 꽃나무와 개나리가 정원을 꾸미고 여름에는 개망초와 푸른 녹색이 그늘을 만든다. 가을에는 단풍으로 물들이며 겨울은 또 다른 운치를 자아낸다.

본지는 지난 3일 경기도 남양주시 평내동을 관통하는 46번 국도변에 인접해있는 조선시대를 여행하기에 좋은 궁집을 탐방했다. 우리 전통의 한옥 그대로를 보존하고 있어 국가민속문화재 제130호로 지정됐다.

남양주시는 궁집을 새롭게 단장하고 2022년 3월부터 한시적으로 오픈했다. 지난 3월부터 시작한 궁집 시민 초청 행사는 월, 수, 금 예약제로 무료 관람할 수 있다.

◆1765년 혼인한 화길옹주가 살던 집

궁집이란 궁(芎)과 집(家)의 합성어로 대군(大君), 공주(公主), 옹주(翁主)와 같이 왕족이 살던 집을 일컫는다. 궁집은 영조가 막내딸이 시집가자 왕명으로 목재와 목수를 보내 지은 집이라 250년 전의 숨결이 그대로 남아있다. 조선시대의 전형적인 사대부가의 배치로써 안채와 사랑채, 그리고 행랑채로 구성돼 있다.
안채는 전형적인 ‘ㅁ’ 자형으로 중문을 두 칸으로 만들어 자연스럽게 안채의 시선을 차단해 남녀의 공간을 엄격하게 구분하는 조선시대 상류사회의 유교적인 의식을 엿볼 수 있다.

또 궁집의 특징은 장대석과 집 전체가 높게 지어졌다. 아래를 내려다볼 수 있게 지어져 신분 상승을 나타내고 있었다. 궁집은 누가, 언제, 왜 집을 지었는지, 누가 살았는지, 기록이 정확히 남아있어 학술적 가치가 높은 유적이다.

궁집은 조선시대 영조의 숙의 문씨 소생 화길옹주(1754~1772)가 출가해 죽을 때까지 살았던 곳이다. 관람하는 동안 안채에서 화길옹주가 나와 반겨줄 것만 같았다. 궁실의 안채는 나무 기둥과 창살 문양 그리고 집안 천장을 받치고 있는 기둥의 자재들은 궁궐에서 사용하는 자재와 문양이다. 궁에서 목수와 자재가 동원돼 집을 지었다는 증거가 된다.

장대석 역시 단단하고 정교하게 다듬어진 돌의 형태를 볼 수 있다.

돌의 상태는 궁궐의 목수나 석공들의 솜씨라고 해설사는 전한다. 안채는 신발을 벗지 않고 연결된 통로나 쪽마루를 이용해서 사랑채로 이동할 수 있게 했다. 주방을 통해 뒷마당으로 나갈 수 있게 연결돼 있다. 뒷마당에는 우물(지금은 물이 말랐음)과 장독대가 있고 정면으로 사랑채로 들어가는 쪽문이 있다.

사랑채는 남성들의 공간을 말한다. 누마루는 사랑채의 꽃이라고 불린다. 경치 좋은 곳에 있었던 정자나 누각을 사랑채하고 결합한 형태다. 좋은 경치를 집안에서도 즐길 수 있게 만든 용도다.

기둥이나 창문틀에 들어가는 모양인 ‘쌍사’라는 무늬를 누마루의 기둥에서 볼 수 있다. 한옥에서 볼 수 있는 또 다른 풍광은 창을 열면 마치 한 폭의 그림이 펼쳐지는 것처럼 풍경을 즐길 수 있다는 것이다. 궁집의 밖 풍경은 더욱 운치가 있다. 30㎝ 이상의 대형 나무 110여 그루로 구성된 울창한 숲은 그 자체가 힐링이 된다. 그늘을 만들며 향기로운 나무 냄새로 취하게 만든다.

◆이야기가 있는 궁집

조선 21대 임금 영조대왕은 14명의 자녀를 낳았다.
그중 12명은 딸이었다. 60세에 얻은 화길옹주는 금지옥엽 사랑받으며 자랐다.

그는 11살에 정혼하고 12살에 시집을 가게 된다. 결혼으로 출궁하는 막내딸을 위해 궁에서 사용되는 자재와 목수가 동원돼 지었다 해 ‘궁집’이라고 한다.

궁집은 궁궐을 짓던 대목장이 설계부터 완성까지 한다.

영조가 나침판을 놓고 지리를 보고 한양과 비교적 가까운 이곳(남양주 평내)을 지정했다고 전한다. 조선시대는 신분을 따라 살 수 있는 집의 크기가 정해져 있었다.

일반 백성은 10칸이 넘지 않아야 한다. 화길옹주는 40칸을 소유했으나 현재는 31칸만 남아있다. 궁집은 화길옹주가 거처했던 안채로 들어가 사랑채로 나온다. 안채 옆벽의 꽃담이 소박하게 아름답다.

안채로 들어가는 대문 위에는 홍살문(귀신과 액운을 물리친다는 풍속)이 배치돼 있다. 아쉽게도 화길옹주는 3명의 자녀를 낳고 19세에 생을 마쳤다. 그의 죽음에 영조는 팔순 잔치도 미루며 넋 나간 왕이 됐다고 전해진다.

◆복합문화공간 ‘남양주 궁집’

남양주 궁집은 화길옹주가 살았던 집이다.

이 궁집은 소유주가 여러 번 바뀌다가 1972년 권옥연·이병복 화가 부부가 약 1만평 되는 궁집 터를 사서 소유주가 됐다. 부부는 각종 개발로 사라져가는 한옥들을 9채 구매해 궁집 옆에 옮겨왔다. 일제강점기 당시 송병준의 별장 중 용인집에 있던 99칸 별장 일부도 옮겨져 있다.

이밖에 다실이라고 불리는 연못이 있는 한옥, 순조의 큰며느리 조대비 친정집을 옮겨와 한국식 야외무대로 만들었다. 또 군산집과 두 채의 초가집이 더 있다. 석물과 옛 정서가 느껴지는 절구통도 눈에 보인다.

군산집 앞은 원형 야외공연장의 형태를 띠고 있다.

지금은 잡초가 자란 야외공연장이지만 한때는 윤석화가 공연했다고 해설사는 전했다. 연못에 물은 없지만 앞으로 시에서 보수공사를 한다면 여름이면 시원한 분수대를 볼 수 있을 것 같다.

궁집 터 안에는 권 화백 부부가 전국에서 수집한 불상, 석탑, 석양(石羊) 문인석을 곳곳에 배치했다. 두 부부는 궁집 주변을 복합문화공간으로 조성하면서 무의자(無衣子) 재단을 설립했다. 무의자는 권 화백의 호로 옷이 없는 사람, 모든 욕심을 벗어던진 사람이라는 뜻이다. 무의자 부부가 살아 있을 때는 이곳에서 연극 음악공연, 영화 촬영, 학술모임 등 각종 문화행사가 열렸다고 한다.

궁집은 도시 계획상 근린공원으로 지정된 산기슭에 둘러싸여 있기에 고층 아파트 단지로 구성된 외부 도시개발지와는 대조적인 자연스러운 숲 경관의 모습을 가지고 있다. 약 8000평의 부지를 확보하고 철거 위기에 있던 전국의 고택들을 해체한 뒤 옮겨와 복원해 복합공간을 조성할 취지로 무의자 박물관을 조성한 흔적들을 볼 수 있었다.

내부는 궁집을 중심으로 초가, 연못 등이 한데 어우러진 마을의 모습을 띠고 있다. 바깥으로 나오면 궁집 둘레길 856m 종합안내도가 보인다.

둘레길을 쉬엄쉬엄 걸으면서 250년 전 역사를 생각하다 보면 어느새 점심시간을 알린다.

궁집 주변 자연과 어우러진 자연식 두부 전문집을 찾았다.

식사 전 먼저 나오는 고소하고 감미로운 두부는 입안을 부드럽게 감싼다. 한여름의 더운 날씨를 보인 이날 식당에서 제공한 시원한 생수는 갈증을 해소하기에 충분했다. 서울에서 그리 멀지 않은 남양주시 궁집. 조선시대로 시간여행을 할 수 있는 궁집을 추천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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