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준의 논설주간. 경영학 박사 

[강준의 논설주간]

고대 그리스에 나르키소스라는 청년이 있었다. 사냥을 나갔다가 목이 말라 물을 마시려고 물웅덩이에 엎드리는 순간 물가에 비친 자신의 아름다운 모습에 도취되어버린 나르키소스는 물가를 떠날 수가 없었다.

그는 자신의 모습에 도취되어 물웅덩이 곁에 앉아 지켜보느라 식음을 전폐하고 자신만을 바라보고 있다가 기력이 다해 죽었다.

이 신화에서 비롯된 말이 나르시시즘(Narcissism)으로 자기애를 일컬는다.

자기 스스로를 실제보다 크게 과장, 과대평가하고 마치 그것을 현실인 것처럼 인식하는 정신증상을 말한다.

과대망상증을 경험하는 사람들은 자신을 위대하고 성취도가 높으며 다른 사람들보다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아울러 관심병에 대한 의미도 타인의 관심을 받기 위하여 고의적으로 비상식적인 행동을 하는 상태를 이르는 말이다.

요즘 일부 정치인을 비롯한 사람들의 행태에서 관심병과 과대망상 나르시시즘에 빠져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여야를 막론 하루가 멀다 않고 생성되는 기행과 어줍잖은 행태를 보면서 과연 저들의 정치적 지향점은 무엇인지 궁금하다.

지극히 상식적인 사안에 대해서도 자신들만의 해석으로 우겨대는 것을 보면 정치라는 것이 사람을 이상하게 바꾸는 것은 아닌가 싶기도 하다.

이유야 어떻든 망상은 지속되거나 주기적으로 나타날 수 있고 매우 높은 자부심이나 부풀려진 자만심 이상이라 생각된다.

그리고 다른 사람을 인정하려 하지 않고 자신의 생각 속에 거두어지지 않으면 자신의 방어적 기저를 조성하기 위해 상대를 폄훼하고 거짓선동을 하게 되는 것을 보게 된다.

상대를 인정하고 존중하지 않는 자기 독선적 배경 속에는 자기 우월주의와 자신이 지닌 힘의 논리에 기인하는 것은 아닌가 생각된다.

국민들이 부여한 지위는 자신의 권리와 독선을 위한 것이 아니라 헌신하고 봉사 해 달라는 의무를 부여한 것인데 완장을 차고 보니 자신의 정체성을 망각하고 권력의 나르시시즘에 빠져 있는 것은 아닌가 생각된다.

노자는 ‘그릇이 가득차면 더 이상 그릇 노릇을 못 한다’고 했다. 그릇에 아직 더 채울 수 있는 여유가 있을 때를 허(虛)라고 불렀다. 

수나라 때 왕릉은 <지학>에서 인간의 승패와 영욕에 있어 평범함과 비범함의 엇갈림이 지(止)란 한 글자에 달려 있다고 보았다.

무엇을 멈추고, 어디서 그칠까가 늘 문제다. 멈춰야 할 때 내닫고, 그쳐야 할 때 뻗대면 삶은 그 순간 나락으로 떨어진다.

겸손하되 비굴하지 말고, 관조하되 비판하지 말고, 빛나되 눈부시지 말고, 차되 넘치지 말고, 검소하되 누추하지 말고, 당당하되 자만하지 말고 겸손하면 행동이 뛰어나다. 아는 척하지 말고 내공을 쌓아가야 한다.

사람들의 일상 가운데 무엇이든 모자람이 없는 완벽한 상태에 있으면 바로 그것 때문에 근심과 불안과 긴장과 불행이 교차하여 행복해지기 어렵다.

적당히 모자란 가운데 그 부족한 부분을 채우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는 나날의 삶 속에 행복이 있다고 여겼던 것 같다. 정치인들의 과대망상적 행태로 인해 국민들은 근심하고 불편스럽다는 것을 알면 좋겠다. 

공직이나 단체를 비롯해 특정한 지위에 오르면 잠시 동안 맡을 한시적 자리임에도 불구하고 평생 그 자리에 머물러 있을 듯한 자세로 직권을 향유하려고 한다.

오르막이 있으면 내리막이 있는 것을 망각하고 자신의 지위로 부터 주어진 권한을 월권하는 오류를 저지르고 있기도 하다. 권리는 반드시 책임을 수반하게 된다.

아울러 자신의 언행에 대한 결과는 오롯이 자신의 몫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권력과 자기도취에 빠져 국민을 향한 관종의 태도는 분명 나르시시즘의 과대 망상적 행태와 별 다를 바 없다는 것임을 깨달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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