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글․사진 윤재천기념사업회 제공

[윤재천 수필 ㊻]

여름의 문턱에 선 우리는 인내와 기다림으로 무장되어 있다.

살아있는 모든 것이 자연을 배경으로 모습을 드러낸다. 검푸른 바다와 우거진 숲, 깊숙한 곳까지 몰려드는 바람-모든 것들이 어우러진 호흡으로 모습을 드러낸다. 아무도 저들을 낯설어하지 않는 것은 그들이 지닌 체온 때문이다. 그것은 진통을 의미하기도 한다. 결실을 준비하는 철두철미한 항쟁, 응결의 몸부림이기도 하다.

세상의 어느 것도 우연히 이루어지는 것은 없다. 땀 흘림이 있어야 하고, 철저하리만큼 내적 응결이 있어야 한다.

삶은 산에 오르는 일에 비유할 수 있다. 산 밑에서 둘레를 보면 그 주위엔 온갖 사물들이 산재되어 있다. 바위와 꽃, 지저분한 것들까지 흩어져 있다. 산을 오르다보면 경사가 지닌 가파름 때문에 힘겨워진다. 그 가파름은 한여름의 땡볕으로도 비유될 수 있다.

그곳이 힘겹고 어려운 등정(登程)이라 해도 그곳을 거치지 않고는 산에 오를 수 없다. 그 힘겨움 때문에 등정의 가치가 있는지도 모른다. 산의 정상에 서면 그 과정이 빚어냈던 힘겨움은 깨끗이 사라지게 된다. 그 과정으로 해서 가치 있는 자신의 위치를 자랑스럽게 생각할 수 있다.

여름은 풍요로움을 의미하며 고통을 뜻하기도 한다. 여기서의 고통이란 비약을 위한 가치창조를 의미하는 말이다.

우리는 풍요로움 속에 모든 행복이 들어 있다고 생각하기 쉽다. 풍요로움이 행복은 아니다. 가치 있는 것을 창조하는 일만큼 벅찬 행복은 드물다. 고통이 숨어있는 기나긴 날들의 행렬 끝에서 일구어낸 창조, 그 푸르름을 위해 무더위와 싸우는지도 모른다.

이 여름에 바캉스니 피서니 하는 낭만적인 단어들이 넘실대는 파도처럼 범람하나, 그보다 중요한 것은 의미 있는 삶의 창조다. 부질없는 것으로부터 자신을 이격시키는 지혜를 이 여름에 배워야 한다. 모든 것들이 삶에 활력소가 된다는 사실을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 때문에 살고 있는 것과 같은 인상은 배제되어야 한다.

여름은 권태의 늪에 빠지기 쉬운 계절이다. 시끄러운 도시의 법석에 등을 돌리고 싶어진다. 태양의 열기에 이름모를 반항이 움트고, 숨 막힐 듯한 거리에 운집한 모든 것에서 해방을 꿈꾸기도 한다. 그들로부터 벗어나고픈 심리가 정체(停滯)를 몰고 온다.

한적한 어촌에 민박을 정하고, 며칠동안 몸과 마음을 쉬며 도시생활에서 찌든 것을 세척해 볼 수 있는 것도 이때다. 우리에게 가장 소중한 것은 무엇일까. 남에게 보여 지는 것만이 우리가 지닌 실체는 아니다. 오히려 형용되지 않는 부분에 더 많은 우리의 모습이 서려있다.

여름은 모든 것과의 마남의 계절이다. 그것이 성숙을 위한 열망이고, 크게 떨쳐나기 위한 웅크림이다.

해의 순수성은 뜨거움에 있다. 눈부신 불을 질러대는 광휘 앞에서 순수를 배운다. 순수는 곁눈질하거나 망설이지 않는 마음을 담고 있다.

불타는 열정, 불타는 학문, 불타는 실험은 새 세계를 열어가는 힘이다. 우리는 여름이 내지르는 빛의 한가운데서 물러날 수 없는 기개를 키워가야 한다.

비상의 나래를 펴라. 이 무더움 속에 더 뜨거운 불살로 이글거려 보라. 여름이 우리를 덥히기 전에, 우리가 여름을 열망으로 채워보자.

이제, 우리를 둘러싼 모든 것이 성숙의 대지에서 자신의 모습을 선보이고 있다. 여름의 주인인 우리가 그들과 만나는 일만 남아있다. 이 계절이 그냥 스치고 지나는 바람줄기로 남지 않기 위해서는 무엇을 해야 할까.

그 해답을 마련하는 때가 이 여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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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정 윤 재 천

경기도 1932년 안성출생, 전 중앙대 교수, 상명여대 교수 등 ‌한국수필학회 회장, ‘현대수필’ 발행인, 한국문인협회 고문, 국제펜클럽한국본부 고문 등 저 서 수필문학론, 수필작품론, 현대수필작가론, 운정의 수필론 수필집 ‌ ‘구름카페’, ‘청바지와 나’, ‘어느 로맨티스트의 고백’, ‘바람은 떠남이다’, ‘윤재천 수필문학전집’(7권), ‘퓨전수필을 말하다’, ‘수필아포리즘’, ‘구름 위에 지은 집’ 등 수 상 ‌ 한국수필문학상, 노산문학상, 한국문학상, 올해의 수필가상, 흑구문학상, PEN문학상, 조경희 문학상, 산귀래문학상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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