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글․사진 윤재천기념사업회 제공

[윤재천 수필 ㊽] 계절은 변함없이 우리에게 봄을 보낸다.

칙칙한 빛깔로 채워져 있던 자리엔 화사한 모습을 드러내고, 온갖 꽃이 현란한 색채와 향기로 채워진다.

자연은 태고의 모습을 유지할 때, 가장 이상적인 면모를 지닌다.

문화와 문명은 자연의 틈새를 비집고 들어온 이끼와 곰팡이에 비유할 수 있다. 이것은 인위적으로 급조되거나 마구잡이로 축조된 부산물이다. 굴러온 돌이 박혀있는 돌을 빼내는 것처럼, 자연을 훼손해 생태계를 엉망으로 만들어 놓아 그 심각성은 더해가고 있다.

인간은 생존의 터전인 지구에서 기거하기 시작해 오늘에 이르는 동안 위기상황에 놓여 생존의 터전으로써 용도 폐기될 상황에 있다.

생존을 위해 필요한 자원은 고갈되어 그 밑바닥을 드러내며, 인구 60억이라는 가공할 숫자를 치닫고 있다.

과학맹신주의와 물질의 결핍으로부터 헤어날 수 있기를 갈망하던 사람의 열망이 유일한 생존의 터전을 이렇게 만들어 놓았다. 살기 위해 시작한 일이 죽음을 불러온 상황과 다르지 않다.

그 당시에는 그 길만이 행복한 삶의 대안이었지만 뒤처리를 제대로 하지 않아 재앙을 겪게 했다. 그러나 누구를 탓할 일도 아니고, 누구에게 책임을 전가할 일도 아니다. 우리 모두가 지구환경을 파괴한 주범이라는 비난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한 치 앞을 내다보지 못하는 근시안적 안목과 우매함으로 파괴된 것은 산과 들, 강과 자연경관만이 아니다.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것만이 아니라, 그 실상이 나타나지 않아 관심의 범주에 들지 않은 것까지 썩은 속내를 드러내어 생존의 근거마저 흔들리게 한다.

우리의 현실은 관념적이고 추상적인 복원의 필요성을 이해하고, 추진하는 것으로 그쳐서는 안 된다. 요즘은 제비가 날아와 살 집을 짓지 못하고, 나비를 찾아볼 수 없다. 그것은 꽃에 향기가 없거나 그들이 빚어 만든 꿀이 없기 때문이 아니다. 그들이 살아갈 수 있는 생존조건이 파괴됐기 때문이다. 얼마나 가공하고 무서운 현실인가. 그 다음에 사라질 대상은 무엇일까. 인류의 모습을 감춘 지구는 어떻게 될까.

자연을 지키는 것은 우리를, 우리의 생존을 지키는 일이다.

그것은 무력으로 해결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피켓을 들고 구호를 외치는 것과 같은 결의의 표명을 통해 자연(自然)이 살아나는 것도 아니다.

제비는 다시 날아와야 하고, 나비는 하늘거리는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주어야만 한다. 우리가 그들과 함께 살 수 있도록 환경이 조성되어야 한다. 제비와 나비만이 아니다. 꽃도 제 정신이 아니다. 가을꽃으로 알고 있던 코스모스가 봄의 거리를 메우고, 보이지 않던 변종(變種)이 나타나 우리를 혼란케 한다. 이런 현상은 뭍에서만 아니라 물가에서도 볼 수 있으며, 깊은 산 속에서나 하늘을 나는 새나 벌레를 통해서도 만날 수 있다.

흔히 꽃을 여자로, 남자는 쾌락적인 삶을 영위하는 나비에 비유하곤 한다.

이 말은 낭만적으로 해석한 말이다. 그것은 사랑의 주체들이다. 도처에 사랑이 아닌 것이 없다. 모든 생명체는 어떠한 형태로든 사랑 없이는 한 순간도 살 수 없는 존재다. 꽃을 번식시키는 것은 나비가 있기 때문이며, 나비도 꽃이 있기에 생존의 힘을 얻을 수 있다. 그들에게 있어서 사랑은 절실한 생존의 방법이다.

생에 있어서 사랑은 아름답게 전개되는 것만은 아니다. 사랑의 고통을 경험하지 못한 사람은 큰 아픔을 모른다. 고통보다 더 큰 것이 그 안에 있기 때문에 찾아 헤매고, 그 굴레 속으로 스스로 걸어가는 것이다. 꽃과 나비에게도 사랑은 필요하다. 그것이 남긴 상처가 크다고 해도 주저하지 않고 사랑의 올가미에 묶이고 싶어 하는 것은 통증의 치유책으로 이보다 좋은 것은 없다.

사랑은 힘을, 무한한 힘을 보유한다. 시들시들 죽어가던 풀잎에 거름을 주면 생기를 되찾는 것은 거름이 사랑과 같은 존재이고, 행복을 만드는 묘약이기 때문이다.

유치환은 “사랑하는 것은/ 사랑을 받느니보다 행복하나니라”고 했다. 혼자만의 일방적인 사랑도 있으나, 사랑의 늪 안에 주는 사랑이 있고, 받는 사랑이 따로 있다. 사랑은 서로가 함께 공유하는 것 이다.

사랑을 주는 것만으로 만족하는 사람이면 그는 범상한 사람이 아니다. 서로 주고받아야 인간의 사랑인 것은 불변의 논리다. 꽃과 나비의 경우처럼…. 사랑은 영원불변한 것은 아니다. 그것은 변화난측(變化難測)하다. 사랑을 주제로 한 작품의 대부분이 비극으로 끝나는 것은 이 때문이다. 누구든 나비처럼 다른 꽃으로 옮겨 앉을 수 있다.

“흔히 꽃은 여자로, 남자는 그를 상대로 하여 쾌락적인 삶을 영위하는 나비”에 비유한 것은 잘못된 생각일까. 여자니 남자니 하는 행위의 주체는 가변적일 수 있다.

세상의 모든 일은, 그 의미는 사랑과 무관하지 않다. 그것이 지속적으로 유지되느냐 하는 것이 관건일 뿐, 의욕은 다른 모습이다. 가시적인 형상물에 비유하면 서로 열병을 앓을 때는 불이고, 시들 때는 얼음이다. 얼음에 불을 가하면 얼음은 이내 물이 된다. 정도에 따라 물만큼의 열기를 가진 뜨거움을 보유할 수도 있다.

…………………………………………………………………………………………………………………………

운정 윤 재 천

경기도 1932년 안성출생, 전 중앙대 교수, 상명여대 교수 등 ‌한국수필학회 회장, ‘현대수필’ 발행인, 한국문인협회 고문, 국제펜클럽한국본부 고문 등 저 서 수필문학론, 수필작품론, 현대수필작가론, 운정의 수필론 수필집 ‌ ‘구름카페’, ‘청바지와 나’, ‘어느 로맨티스트의 고백’, ‘바람은 떠남이다’, ‘윤재천 수필문학전집’(7권), ‘퓨전수필을 말하다’, ‘수필아포리즘’, ‘구름 위에 지은 집’ 등 수 상 ‌ 한국수필문학상, 노산문학상, 한국문학상, 올해의 수필가상, 흑구문학상, PEN문학상, 조경희 문학상, 산귀래문학상 등

저작권자 © 경인종합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