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인종합일보 전경만 기자]

역대 조선왕들 중에 적통이 아닌 찬탈에 의해 왕이 된 사람은 세 명이다. 세조와 중종 그리고 인조다. 세조는 어린 조카의 왕위를 찬탈했으며 중종은 연산군의 뒤를 이어 왕이 됐다. 그리고 인조는 광해군을 대신해 왕위에 올랐다.

세 명의 공통점은 힘을 동원해 권력을 빼앗았다는 것에 있지만 속내를 들여다보면 정치적 욕심이 있었던 세조는 정말 왕위가 탐이나 왕위를 찬탈했으나 나머지 두 명은 상황이 조금 다르다.

먼저 중종을 보면 스스로 왕이 될 생각이 전혀 없었던 인물이다. 왕위를 찬탈당한 연산군은 비록 폭정을 일삼고 신하들의 계집권유에 놀아나기는 했으나 이복동생인 중종을 매우 아꼈다고 실록은 전한다. 실록에 따르면 반정을 주도한 대신들이 중종을 옹립하기 위해 군사들을 몰고 오자 중종은 적이 쳐들어 온 것으로 착각할 정도였다고 한다.

‘신하가 왕을 선택할 수는 없다’는 신념에 따라 몇 번이나 왕위를 거절했던 중종이었지만 신하들의 물리적 압력에 굴복에 그는 왕이 됐다. 중종은 왕이 된 이후에도 신하들의 권력독점을 두려워했다. 그래서 재임초기 권력을 쥐고 있던 공신들을 내몰고 중기에는 조광조로 대변되는 사림파들이 대거 정계에 진출해 권력을 독점하자 또 다시 일거에 숙청을 단행했던 왕으로 기록되어 있다. 말년에는 외척을 등용해 윤원형 등이 위세를 업고 명종으로 이어지게 된다.

중종은 재임기간 동안 특별히 내세울 만한 공이 없다. 그러나 재임 당시 경상도 일대에 날뛰었던 왜구들을 대응하기 위해 조선 후기까지 이어지는 비변사를 두었으며 북쪽에서 난을 일으키던 여진 일당을 정리하기도 하는 등 나름의 공이 컸었다.

그럼에도 중종의 역사가 잘 알려지지 않은 까닭은 그의 성격에 있다. 차분한 왕 이었으며 신하들의 간언을 귀담아 들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한 번 결정을 하면 마치 다른 사람인 것처럼 돌변해 일을 처리했다고 한다. 사간들은 중종이 권력자를 처단함에 있어 주저함이 없자 마치 “두 사람의 임금을 보는 듯하다”고 기록을 남겼다.

그러나 단종을 폐위시킨 세조와 광해군을 폐위시킨 인조에게는 모두 '조'(祖)가 붙어있으나 중종은 그렇게 대접받지는 못했다. 중종의 뒤를 이어 왕이 된 인종은 '종'(宗) 자로는 부족하다 하여 중조(中祖)를 제안했는데, 연산군을 대신해 성종을 잇는 왕으로써 '조'(祖)를 붙이는 것은 맞지 않다는 반대 때문에 중종은 중조가 되지 못했다.

조선의 역대 임금의 칭호에서 ‘조’붙은 임금은 스물여덟 명 중에 태조를 제외하곤 딱 다섯 명에 불과하다. 세조, 선조, 인조, 영조, 정조뿐이다. 나라를 건국했거나 그와 비슷한 무엇을 남겼을 때뿐이다. 그들이 살아 있을 당시 자신이 죽은 뒤에 왕호에 조가 붙을지 생각했는지는 모르지만 훗날의 사람들은 ‘조’붙여 그들의 행적을 기록했다.

현재로 돌아와 대한민국의 통치사에 등장하는 대통령의 이름 뒤이거나 앞에 무엇이 붙을지는 생각을 해봐야 할 문제다. 독립운동에 공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국민을 서울에 남겨두고 홀로 도망간 것이 선조와 비슷하다고 알려진 이승만 대통령을 필두로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 김영삼, 김대중 대통령 등에게 국민들이 명명한 이름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들은 다 알고 있다. 그리고 서민의 우상이자 영원한 바보 대통령으로 알려진 노무현 대통령이 뒤를 이어 사대강 이명박 대통령과 혹시 ‘사드’와 관련 된 이름이 붙을지도 모르는 현 박근혜 대통령이 있다. 모두의 이름 뒤에 무엇이 남을지는 역사가 기록할 일이지만 역사를 쓰고 있는 것은 바로 오늘이라는 점을 깊이 생각해 볼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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