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인종합일보 전경만 기자]

법률이 엄한 국가의 대명사처럼 여겨지는 나라가 있었다. 너무 법률이 엄해 ‘대명천지(大明天地)’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명나라의 법률은 엄했다. 도둑조차 법률에 의거해 도둑질을 했다고 할 정도다. 그러나 법률이 엄한 명나라도 결국 환관과 결탁한 고위관료의 부패와 간신을 알아보지 못한 황제의 무능 탓에 망했다. 명나라 다음에 들어선 청나라가 자금성에 화살 한 번 쏘지 않고 입성할 수 있었던 이유가 바로 부패 때문이었다.

조선은 명나라 보다 더 엄격한 법률을 정비했다. 명나라의 사신들은 조선의 법률이 너무 엄하다 하였고 노비에게 지나치게 가혹하다 할 만큼 조선의 법률과 신분제도는 부패와 혼란에 대해 무거운 잣대를 가지고 있었다.

조선시대에는 관리의 부정부패와 비리를 ‘사헌부(司憲府)’라는 곳에서 담당했다. 사헌부라는 이름 자체가 ‘법과 기강을 담당하는 곳’이란 뜻이다. 사헌부 고위직은 신하에 대한 탄핵이나 임금에 대한 충고 등 주로 정치적으로 권력자를 견제하는 기능을 담당하고 나머지는 하위직 24명이 근무하는 감찰방에서 담당했다. 그리고 감찰방에는 감찰 24명의 대표자로서 모든 감찰 업무를 총괄하는 방주(房主)와, 감찰방에서 수행한 업무를 매일 본청에 보고하고 동료 감찰의 비위를 규찰하는 역할을 하는 두 명의 유사(有司)라는 책임 관리가 있었다.

조선시대 감찰들은 곡식의 출납과 조회, 제사는 물론, 크고 작은 거의 모든 국가적 행사에 감찰이 관여 했다. 관원의 불법 행위, 부당한 상거래, 과거시험에서의 부정 등 거의 모든 국가적 사무가 감찰의 대상이었다. 그리고 감찰 업무의 특성상 편안히 감찰방에 앉아 사무를 보는 내근보다는, 감찰방 밖으로의 외근이 훨씬 많을 수밖에 없었다. 이 때문에 24명의 대규모의 관원을 배치하게 됐다.

사헌부는 감찰이 입회해야만 집행될 수 있는 행사의 종류를 일일이 법률에 규정해 놓았으며, 국가 행사를 주관하는 관청으로 하여금 행사 수일 전에 공문으로 행사 사실을 사헌부에 통지하게 했다. 감찰의 파견을 요청하는 공문이 사헌부에 접수되면 주무 책임자인 장무지평(掌務持平)을 통해 간부회의에 보고되고, 여기에서 업무 분담이 결정되면 외근해야 할 감찰은 곧 자신이 배정받은 관청으로 출근해야 했다. 조선은 오늘날만큼 국가 행사 일정을 명문화했을 뿐 아니라, 오늘날보다 더 체계적으로 거의 모든 국가 행사에 감찰이 입회함으로써 행사 절차 준수 여부와 이 과정에서 생길 수 있는 부정의 여지를 차단하려 했다. 또한 감찰의 부정을 막기 위해 매일매일 담당 감찰을 바꾸기도 했다.

세상의 어떤 나라보다도 엄하고 훌륭한 제도를 가지고 있었던 조선이 망하게 된 것은 제도가 미비해서는 아니었다. 조선은 사헌부의 감찰 기능이 부족하다 싶을 때는 어사를 따로 파견하기까지 하며 관리의 부정부패를 감사하기도 했지만 결국 부정과 부패로 망한 대표적인 나라가 됐다. 부정과부패가 본격적으로 발생한 시기는 16세기 이후다.

조선후기에 들어서면서 고위직의 부패가 만연해진다. 능력보다 출신이 강조되고 출신학파에 따라 고위직을 나눠먹는 파당정치가 조선후기를 지배한다. 파당으로 고위직에 오른 관리는 자신을 이끌어준 사람에게 뇌물을 바쳤다. 그리고 뇌물은 자신의 아랫사람들을 착취해 모은 것이다. 이런 착취구조가 하부로 내려가면서 인적구성의 가장 하부에 있는 백성들의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컸다. 결국 민란이 일어나고 민란을 막지 못한 중앙정부는 외국군대에게 자국민을 학살해 달라고 부탁한다. 이때 들어온 외국군대가 바로 일본군이었다. 작금 한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박근혜 -최순실 게이트에 대해 국민들이 엄한 처단을 요구하고 있는 것은 부패가 나라를 망하게 하는 지름길이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며 나라에 대한 사랑이 아직 남아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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