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인종합일보 전경만 기자]

고려의 뒤를 이어 왕조를 세운 이씨왕조는 불교 대신 유교를 국가의 통치이념으로 세웠다. 불교와 달리 유교는 사농공상(士農工商)의 구분이 엄격하고 반상의 구분이 유달리 강했다. 유교적 통치가 오랜 동안 지속됐던 조선에서 가장 유교적인 훈장을 찾아보라 한다면 홍살문을 들 수 있다. 홍살문은 능(陵)·원(園)·묘(廟)·궁전(宮殿) 또는 관아(官衙) 따위의 정면 앞에 세우던 붉은 물감을 칠한 나무로 만들어진 문이다.

조선의 왕은 유교의 법도를 잘 따른 백성들에게 홍살문을 내렸다. 국가로부터 홍살문을 하사 받은 집안이나 개인은 군역 등의 면역이 있었을 만큼 경의의 대상이었다. 홍살문을 받은 사람들은 대개 효부, 효녀, 열녀 등이 대부분이었다. 조선 초기에 홍살문을 받았던 사람들은 대체로 권문세가를 중심으로 있었으나 중기에 들어서면서 홍살문을 받은 이가 거의 없다가 임진왜란을 기점으로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국가 재난으로 인해 요절하는 이가 늘어난 만큼 사실과 관계없이 현실적으로 효자, 효부, 열녀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기 때문이다. 이때 만들어진 책도 있다고 한다. 조선 후기로 들어서면서 홍살문을 받을 수 있는 사람들이 많이 줄어든다. 여러 가지 사회적 이유가 있겠지만 전반적으로 착취구조가 더욱 단단해지면서 조선의 백성들은 유교적 이념에 의한 삶보다는 생존을 우선시했기 때문인 것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일부 양반층 사이에서는 여전히 임금이 하사한다는 홍살문에 미련을 두는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 많은 양반집 여자들이 고통을 당했다.

조선 후기 들어 과부의 재가(再嫁)는 일반화 된 일이었으나 양반집에서는 아니었다. 오히려 더 혹독하게 여성들을 단속했으며 자살을 종용하기도 했다. 모두 홍살문을 받기 위함이었다. 조선 중기를 넘어 후기에 이르러 임금이 하사한 홍살문 대부분이 여자들의 희생으로 만들어진 가문의 영광이었다.

일제강점기에 들어서면서 홍살문을 하사할 임금이 사라져 수절을 강조하거나 자살을 강조하는 분위기는 반전되는 많이 사라졌으나 홍살문의 풍속은 조선이 망하고 난 뒤에도 오랜 시간 동안 유지되어 왔다. 지금도 홍살문의 잔재가 아주 사라진 것은 아니다. 대통령이 주는 훈장을 받겠다고 아우성을 치는 사람들이 간혹 있기도 하다.

오늘날에는 홍살문 즉 왕이나 대통령으로부터 훈장을 받아 집안의 명예를 일으키고 남들로부터 경의를 받겠다는 사람들은 많이 줄어들었다. 그리고 홍살문의 확대개념인 과부 재가금지는 아예 사라졌다. 그러나 한국 땅에서 여성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늘 홍살문을 이고 사는 것이나 다름없을 만큼 많은 사회적 규범들이 있다. 하다못해 같은 담배를 피워도 여자가 홀대 받는 세상이다. 여기에 육아까지 책임진 여성들이 갈수록 늘어나고 있다, 지금은 아이를 기를 여유와 시간조차 주지 않으면서 낳지 않는 책임까지 여성에게 씌우고 있다. 룰이 바뀐 또 다른 홍살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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