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조 25년 임진왜란이 발발했을 때 서애 유성룡은 사회기강을 제대로 다잡지 못할 경우 한나라의 운명이 천길 낭떠러지로 곤두박질치는 것은 시간문제라고 했다.
현재 우리는 뚜렷한 국가정체성을 바탕으로 사회기강을 바로 세우고, 국방을 튼튼히 하며 국제 정세를 잘 파악하고 있는가?
지금 세계 경제가 너무 응고되어 언제 해빙기를 맞을까 우려의 목소리가 높은 이때, 우리 동족인 북한은 개성공단의 계약을 파기하고, 전쟁위협의 발언을 서슴치 않고 있으며, 정치권은 서민과 국민은 생각하지 않고 자기 집권세력의 힘을 키우겠다고 세상을 시끄럽게 하고 있다.
악조건 속에서도 좌절하지 않고 17전 17승의 승전기록을 남긴 이순신장군(1545~1598)에게서 이 시대의 치열한 경제 전쟁에 대처할 전략과 정신을 배울 것을 제안한다.
이순신장군의 ‘난중일기’나 유성룡영의정의 ‘징비록’을 읽어보면 두 분의 군사통제와 전술능력, 충성심과 애국심, 용기면에서 감히 인간의 힘으로 해낼 수 없는 초인적인 능력을 엿볼 수 있다.
이순신장군이 그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승전보를 울린 것은 모든 사람이 믿고 따를 수 있는 청렴결백과 공정성, 빈손으로 수군을 재건할 수 있었던 진취적 기업가 정신, 솔선수범으로 보여준 실천적 리더쉽, 거북선을 개발해 낸 혁신적사고, 전쟁의 기록을 ‘난중일기’로 남겨 지식과 경험을 공유하도록 한 기록정신, 환경에 대한 정보수집과 그에 기초한 진단분석 등이다.
백의종군하다가 1597년 위기에 처한 조선을 되살리기 위해 돌아온 이순신장군이 단 12척의 배로 수백 척의 왜군 전함을 격파했던 명량대첩(鳴梁大捷)은 바로 이런 전략과 전술이 이뤄낸 성공이라고 생각한다.
서애 유성룡은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이순신장군과 권율장군을 등용하여 나라의 위기에서 구출했다.
어렸을 때 이순신과 함께 자란 유성룡은 힘이 장사이고 의협심이 강한 이순신을 좋아 했다.
이순신은 말과 행동이 엄격하고 지혜와 용맹이 특출했으므로 다른 무사들로부터 존경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학문과 서예에 까지도 실력을 겸비 했다.
예화로 이순신은 덕수 이씨 문중 제사에 갔다가 망부석이 반쯤 기울어져 있는 것을 보고 머슴 4명을 시켜 바로 세우려고 했으나 머슴들이 힘에 겨워 바로 못 세우니 이순신은 자기 등을 망부석에 바치고 이어 일갈하고 힘을 쓰니 망부석이 바로 잡혔다는 일화로 유명하다.
덕수 이씨 문중에서 이순신을 본 요즘으로 말하면 총무처 차관급인 이율곡(이순신보다 10살정도 윗분)은 충성심이 강한 이순신에게 도움을 주고파 유성룡을 통해 이순신을 만나려고 하였지만, 전랑으로 있을 때만은 만날 수 없다고 거절하였으니 이순신의 청렴함을 단적으로 말해 주는 것이다.
많은 공을 세운 이순신의 업적을 시기하려는 무리들 때문에 모함을 받아 38세가 되던 해 만호(지금의 중령급)에서 파직당했고, 1년 후 다시 복직하여 함경북도 권관(지금으로는 준장급)으로 근무하면서 수많은 전쟁에서 승리하였고 호적의 습격을 받아 60명이나 포로가 되어 잡혀가는 것을 구출하다가 화살을 맞고 넓적다리에 상처를 입었지만, 많은 사람들의 모함을 받아 여러번 투옥되기도 하셨다.
하지만 유성룡은 이순신의 애국심과 양심을 믿고 임금님께 상신하여 탄핵을 받아 백의종군하던 이순신을 천거했다하여 북인으로부터 탄핵을 받아 관직을 삭탈 당하기도 했다.
유성룡의 ‘징비록’을 읽어보면 조선은 참으로 한심한 나라였다. 대한해협에서 일본군이 금방이라도 쳐 들어오려는 전운이 감지되었는데도 국방을 소홀히 하다 일본군에 파죽지세로 쫓긴다. 정작 놀라운 것은 당시 지도층의 혼란 상황이다.
북상하는 왜군을 토벌하러 간 조선의 장군들은 적의 정세를 알려주는 농민의 목부터 베었고, 유언비어를 퍼뜨려 관군을 동요시킨다는 죄목으로 감옥에 넣고, 정작 왜군에 패퇴한 관군은 지나가는 의병을 몰살시켰다.
이 정도면 분명 망해야 할 나라인데 조선은 결국 왜군을 몰아냈다.
무엇이 이를 가능하게 했을까? 나라가 어려울 때 인물이 나왔기 때문이다.
영의정까지 지낸 유성룡은 비 내린 진흙땅에 무릎을 꿇고 명나라 장수 이여송 앞에서 군량미 조달이 늦어졌다는 이유로 질책을 당한다.
유성룡은 나라를 구하는 데 자신의 개인적 굴욕은 사사로운 일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명나라 제독 진린은 마음에 안 드는 조선 관리의 목에 새끼를 매고 질질 끌고 다녔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는 이순신 장군의 다른 면모를 발견한다.
진린을 극진히 대접하여 먼 바다 까지 영접 나간 것은 물론이고 왜군의 목 오십을 진린에게 상납한다.
유성룡과 이순신의 행동은 언뜻 보기에 비굴한 것 같지만 나라를 구하기 위해 자신의 자존심을 숙인 높은 뜻을 엿 볼 수 있다. 그러나 통신사 부사로 1590년 일본에 간 김성일은 이와 대조적이다. 그는 자신을 내세워 가는 곳마다 융숭한 대접을 받았다고 한다.
그러나 귀국 후 통신사 정사 황윤길과 달리 “일본은 침략의도가 없다.”고 주장했다.
반대 당파에 속하는 황윤길이 전쟁 위협을 너무 강조해 민심이 흉흉해질까봐 그랬다는 것이다. 나중에 의병을 일으켜 왜적과 싸우다 장렬히 전사하기는 했지만, 자신이 속한 당파의 코드에 충실했다가 나라의 안보에 위험을 초래한 셈이다.
유성룡은 한양에까지 왜군이 쳐들어와 나라가 매우 위험에 처하자 임금님은 명나라로 도망을 치려고 할 때, 임금님은 이 나라를 떠나면 이 나라 임금이 아니고 이 나라 국민도 나라를 잃게 되니 절대로 한 발자국도 옮기면 안된다고 권한다.
만약 그때 유성룡이 임금을 만류하지 않았다면 조선은 어떻게 되었을까.
1598년 8월 17일 임진왜란의 원흉 도요도미 히데유시가 죽으니 왜군이 철수했다. 이순신은 이를 용납하지 않고 마지막 달아나는 왜함 50여 척을 추격해 남해 노량에서 큰 격전을 벌였고, 충무공은 밤새 독전하다가 날이 샐 무렵에 왜군의 탄환에 맞아 장고히 전사(戰死)하셨다.
우리 교육자는 피비린내 나는 7년간의 임진왜란을 자기의 죽음으로 종식시킨 이순신과 말없이 조국만을 사랑하고 애쓰신 유성룡을 본받아 큰 인물로 키우는 참 스승의 길로 가야 하겠다.
많은 제자들 앞에서 교사들을 부조리의 원흉으로 생각하고, 교실까지 들어와 쇼핑백을 뒤지고 자동차 트렁크를 뒤지는 국민권익조사관들은 반성해야 한다.
물론 조사관들에게 교육을 잘못시킨 교사들의 책임일수도 있겠다.
국가가 어지럽고 어려울 때 일수록 일선에서 묵묵히 2세 교육을 위해 불태우는 교육자를 우대하여야 국가가 바로 선다는 사실을 교육부장관과 이명박대통령은 알아야한다.

박태원 객원논설위원


저작권자 © 경인종합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