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글․사진 윤재천기념사업회 제공

[윤재천 수필 ㊺]

중국 황하(黃河)는 백년하청(百年河淸)이라 했다.

강물이 맑고 푸른 날이 없다는 뜻이다. 강물이 맑고 푸름은 인간의 뜻대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기후와 풍토가 그 강물을 푸르고 맑게 두질 않으니 아무리 맑은 강을 기다리며 백 년을 보내도 푸를 수가 없다.

해방 후 지금까지 우리는 크고 많은 일을 거쳐 왔다. 한일합방 이후 36년간 일제치하의 굴욕 되고 자유가 없던 세월을 지나 준비 없이 맞은 해방은 우리에게 너무 많은 자유의 기쁨을 주었고, 그 기쁨을 내 것으로 만들려는 순간에 6ㆍ25의 민족적 수난을 겪어야 했다.

사변의 참해(慘害)를 겪고 휴전이라는 푯말 앞에서 부흥과 복구에 집념하면서 그 집념이 차츰 타성과 나태로 변했다. 사리사욕만을 일삼던 아집(我執)스런 집권에 대한 반발로 학생의 분노는 4ㆍ19의거를 맞았다. 정치적으로 혼란스럽고 국민은 갈피를 잡지 못해 우왕좌왕하면서 또 한 번의 비극을 맞아야만 했다.

분단된 국토에 헤어진 민족의 비극은 커다란 불행을 자초했고, 우리의 역사는 수난과 고난이 점철됐다.

커다란 역사적인 사실이 이 땅 위를 지날 때는 그때마다 크고 무서운 소용돌이가 생긴다. 자칫 그 와중(渦中)으로 휩쓸리기도 하고 한발 잘못 딛고 거센 소용돌이에 휘말리기도 한다.

소용돌이쳐 쏟아져 흐르는 힘은 무서운 것이다. 흐르고 난 다음에는 여울이 진다. 잔잔하든 거세든 한 번 여울이 지면 이 여울을 건너야 하듯 우리는 늘 소용돌이를 무서워하고 거센 여울을 건너기가 힘들었다. 이러한 잦은 횟수는 습관을 만들고 구실을 만들었다.

과도기, 이런 시기를 이름 하여 과도기라 불렀다.

급변하는 사태는, 우리를 항상 어리둥절하게 한다. 혼돈 속에서 안정을 찾기 전에 다른 사태가 생기면 혼돈의 와중으로 밀려가고 과도기는 연속되어 길어진다.

오늘에서 내일까지, 아니면 어제와 오늘 사이에 발전이 있고 달라지는 게 있어야 한다. 오늘이 어제와 같고, 내일이 오늘과 같다면 우리 사회는 침체되고 정지된 상태에 머물게 된다. 그것은 생명을 멈추는 시기와 같다. 살아 있음은 끝없이 작동하고 변화하기 때문이다.

변화를 잃어버린 사회에서는 보다 잘 살 수 있는 가능성이 무너지고 만다. 어제와 오늘이 달라질 때는 보다 바람직한 방향으로 전환되어야 한다.

우리에게는 시정되어야 할 유습, 그릇된 전통과 현대적 모순이 도사리고 있어 사회발전을 지체시키고 있다. 세대 사이의 갈등이라 할까, 낡은 유습과 새로운 사조가 충돌되는 것을 흔히 볼 수 있다. 여기에서 또 하나의 소용돌이가 생기고 이 소용돌이 속을 지나가자니 과도기 운운이 대두된다.

하루하루 평온한 사태의 진전에 갑자기 홍수가 지고 큰 변혁이 올 때, 거대한 진통의 전환기에 처해진다. 해방 이후 벌써 몇 년인가. 20여 년이 지났다. 그 사이 숱한 혼란이 거듭됐어도 이젠 20년 성년의 나이에 든 우리나라, 우리의 조국이다.

가끔, 우리는 조국이 주는 환경을 잘못된 변명으로 삼으려 한다. 탓에는 조상 탓과 과도기 탓의 두 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하다가 안 되면 조상 탓이요, 하다 못하겠으면 과도기 탓이다. 20년 세월의 숱한 변화를 구실로 눈앞에 닥친 어려움을 변명하려고만 할 수는 없다.

이제 여울물이 말끔히 빠지고 질펀하던 흙탕도 굳어졌다. 물 고인 땅이 굳어진다는 경구(驚句)를 되새겨 볼 때다.

걸핏하면 휘두르던 ‘과도기’란 말은 영원히 잊어버려도 좋다. 과도기에 처해진 국민임이 자랑일 수는 없다. 비록 과도기에 처해 있어도 와중에 휩쓸리지 않고 과도기를 넘길 수 있는 의지와 신념이 요구된다. 흙탕지고 거세던 물결이 빠져야 한다.

황하가 푸르기는 불가능하다. 황하는 원래부터 황했기 때문이다. 황하는 백년하청이지만, 우리 현실의 ‘만년과도기’는 흘려버려야 한다.

황하의 백년하청과 우리의 만년과도기가 결코 같은 의미일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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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정 윤 재 천

경기도 1932년 안성출생, 전 중앙대 교수, 상명여대 교수 등 ‌한국수필학회 회장, ‘현대수필’ 발행인, 한국문인협회 고문, 국제펜클럽한국본부 고문 등 저 서 수필문학론, 수필작품론, 현대수필작가론, 운정의 수필론 수필집 ‌ ‘구름카페’, ‘청바지와 나’, ‘어느 로맨티스트의 고백’, ‘바람은 떠남이다’, ‘윤재천 수필문학전집’(7권), ‘퓨전수필을 말하다’, ‘수필아포리즘’, ‘구름 위에 지은 집’ 등 수 상 ‌ 한국수필문학상, 노산문학상, 한국문학상, 올해의 수필가상, 흑구문학상, PEN문학상, 조경희 문학상, 산귀래문학상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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