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글사진 윤재천기념사업회 제공

[윤재천 수필 ]

종로통(鐘路通)을 지나다가 뒤에서 사장님, 하고 불렀더니 열 사람 중, 아홉 사람이 돌아보더라는 재미있는 유행가가 있었다.

사장님이 많은 세상.

뒤돌아보지 않은 한 사람은 전무라나. 전무도 머잖아 사장님이 되실 인물이다.

전화 한 대만 있으면 회장님이고, 사장님의 전화는 다방에 있단다. 다방 전화가 사장님의 업무 연락용 전화다. 콧구멍만한 사무실을 넷으로 칸을 질러 칸마다 앉아 계신 사장님은 다방에서 세월을 지새우는 사장님보다는 한결 그럴 듯하다. 이 사무실도 문밖에서 누가 사장님, 하고 부른다면 네 사장님 모두 목을 뒤로 빼돌릴 것이다.

어쨌든 재미있는 세상이다.

사장님이 많든, 회장님이 많든, 장이 많고 님자를 붙여야 할 대상이 많다는 것은 그만큼 우리 사회에 인물이 많다는 얘기가 된다.

너도 인물이요, 나도 인물인 세상이다. 예로부터 한 사람을 죽이면 살인자요, 많은 사람을 죽이면 영웅이라 했다. 이 진리(?)에 모순이 있는지 잘은 모르겠으나, 옛말 틀린 것 별로 없다는 얘기도 있고 보면 그냥 헛말만은 아닌 성싶다.

일요일에 경복궁 미술관에서 전시되고 있는 프랑스 현대 명화전을 관람하러 갔다. 그림에 문외한이지만, 세계적으로 유명한 화가들의 원화(原畵)가 전시되었다니 알든 모르든 그대로 지나치긴 섭섭한 생각이 들어 없는 시간 쪼개어 들렀다. 일요일이라 그랬던가, 때가 상춘가절이라 고궁의 봄빛이 그리워서였던가, 많은 사람이 장사진을 친다.

노(老) 할머니를 모신 젊은 며느리도 있고, 네 살부터 여섯 살까지의 아들딸을 사이에 끼운 인텔리 부부도 있다. 동행한 친구가 말하기를 “과연 우리 국민은 문화인이로구나”라고 감탄을 금치 못하면서, 그런 의미로 너와 나도 아주 수준 높은 문화인의 대열에 끼였으니 후에 축배라도 들어야겠다면서 전시장 안에 들어서자, 이 친구 하는 말이 “우리 제발 심각한 표정일랑 짓지 말고 봅시다”라고 한다.

우린 웃음을 참지 못하여 좌우를 돌아보니 모두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을 연상케 하는 표정들을 짓고 있는 게 아닌가.

사장님, 문화민족, 가히 축복 받는 사회에 살고 있다고 자부하면서 씁쓸한 뒷맛은 무엇일까. 내가 사장님이 못되어서인가. 돌아본 백여 점의 그림이 전부 내 이해밖에 있기 때문인가.

어쨌든 인물도 많은 세상이고, 문화인도 많은 세상에 우리는 살고 있다. 아무리 못난 놈도 누굴 속이고 사기 치건, 손바닥에 돈이 조금 굴러지면 일약 나는 인물입네 으쓱대는 세상이다.

옛날엔 인심이 천심이라 했다지만, 오는 21세기에는 어림없는 말씀이다. 태양을 따르는 해바라기엔 차라리 순정이라도 있지만, 돈을 따라 하루 종일 고개를 회전해야 하는 오늘은 오히려 가엾다. 돈이 곧 태양 - 수많은 눈물이 애소를 띄고 돈을 향해 머릴 곧추세운다. 두 눈은 충혈 된 채….

돈을 가진 사람의 역량이나 인물 됨됨 같은 것은 아무래도 좋다. 달리 인물이란 정의를 내릴 아무것도 갖지 못한 것이 오늘 내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이다. 오로지 돈 가진 사람이 되어야겠다. 권세 가진 사람이 되어야겠다. 돈이 없어 목이 비틀리고, 권세 없어 짓밟히는 세상이다. 나도 짓밟고 일어서야겠다. 완력이라도 휘둘고, 없어도 있는 척하고, 몰라도 아는 척 해야겠다.

내가 살고 봐야겠다. 나도 인물이 되어야겠다는 줄기찬 집념들 - 너는 사장이고, 그는 문화인인데 나는 아무것도 아니어서 되겠느냐는 사고방식들….

어디에서부터 잘못을 찾아야 할까.

어딘가 곪아 가고 있다. 깊이 화농(化膿)해 가고 있다. 이젠 마이신으로는 화농을 제거할 수 없게 됐다. 외과의를 찾아 수술도로 깊이 그어야 한다.

누가 와과의가 될 수 있는가.

누가 올바른 진단을 내려 제대로 치료할 수 있는가.

누가 고달픈 해바라기의 목을 갖지 않고 있는가.

어쨌든 좋다.

어쨌든 인물만 되면 살 수 있는, 우러러 살 수 있는 사회다.

어쨌든 이란 어휘가 풍기는 뉘앙스마냥, 어쨌든 살고보자는 수단과 방법은 애초에 그 진가 이상의 가치를 부여받고 있는 오늘이다.

제발 수단과 방법과 목적의 혼용을 바로 잡았으면 한다.

친구를 헐뜯고, 없는 말 만들어 모략하지 않는 우정의 세계를 이어가는 사회가 되었으면 한다. ‘우정에는 승부가 없다’는 말이 절실히 요청되기도 한다.

어쨌든 인물이 될 수 있는 사회가 아니었으면 한다.

어쨌든 이란 관형사는 붙을 곳이 따로 있다.

인물이란 단어 앞에 어쨌든 이란 관형사는 물러가 주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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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정 윤 재 천

경기도 1932년 안성출생, 전 중앙대 교수, 상명여대 교수 등 한국수필학회 회장, ‘현대수필’ 발행인, 한국문인협회 고문, 국제펜클럽한국본부 고문 등 저 서 수필문학론, 수필작품론, 현대수필작가론, 운정의 수필론 수필집 ‘구름카페’, ‘청바지와 나’, ‘어느 로맨티스트의 고백’, ‘바람은 떠남이다’, ‘윤재천 수필문학전집’(7권), ‘퓨전수필을 말하다’, ‘수필아포리즘’, ‘구름 위에 지은 집’ 등 수 상 한국수필문학상, 노산문학상, 한국문학상, 올해의 수필가상, 흑구문학상, PEN문학상, 조경희 문학상, 산귀래문학상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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