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글․사진 윤재천기념사업회 제공

[윤재천 수필 ㉙-1]

1. 첫 번째 얘기할 내용의 주제는 ‘길’ 입니다.

‘길‘은 모든 만남을 주선하는 실질적 주최자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어떻게 말을 하던 틀린 대답은 없을 겁니다. 우린 이미 먼 길을 걸어오면서 수많은 길을 봤으니까요. 길은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것 같지만, 태초에는 세상 모두가 길이었습니다. 사방이 길이었으니까요. 막힌 곳이 없으니, 어디든 걸음을 내디디면 길이 됐습니다.

그 자리에 문명이 들어와 앉아, 자리를 차지해가면서 길은 지금 이들의 틈에 끼어 겨우 경계나 표시하는 일을 하며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형편입니다.

그러나 길은 이런 물리적인 길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삶도 길 위에서 펼쳐집니다. 찾아오기도 하고, 또 찾아가기도 합니다. 모든 삶의 현실은 길을 따라가며, 길 위에서 벌어지는 일들입니다. 길은 무대(舞臺)이기도 합니다. 어떤 이들은 어제 이미 밟고 갔던 길만 계속 밟고 가 단단한 길을 만들어놓기도 하고, 어떤 이는 앞서 갔던 사람의 뒤를 따라 그 길만을 밟고 가면서 길을 길답게 다져놓기도 합니다.

길은 육지 위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바다에도 하늘에도 있습니다. 갔던 길과 가지 않은 길만이 있을 뿐, 길이 아닌 것이 없습니다.

우리의 일생은 이 ‘길’이라고 하는 배경 위에서 펼쳐집니다. 그러다보니 역사도 길이고, 문화도 길이며 철학도 길입니다. 나는 60년 동안, 이 길 위에서 살아왔습니다. 남은 시간이 얼마인지는 모르지만, 버릇처럼 이 길을 밟고 어디든 갈 것입니다.

나는, 길을 어머니라고 생각하기도 하고, 아버지라고도 여깁니다. 이분들 덕분에 내 삶의 첫 번째 발자국은 아직도 경기도 안성(安城) 어디인가에 남아 있을 것입니다.

땅속 어딘가에 묻혀 있겠지요.

남의 눈에 보이지 않아도 분명히 그 어느 곳에 있을 겁니다, 그곳이 내 고향이고, 어느 정도의 나이에 이를 때까지 그곳을 떠나본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안성 - 비교적 한적한 시골이던 안성에서 소년 시기를 보내면서 해방을 맞았고 이어진 6.25전쟁과 국가위기사태로 누구나 가난할 수밖에 없는 시절을 살았습니다. 그때의 소망은 과수원을 장만하여, 주변현실에 휘둘리지 않고, 나를 찾아오는 이웃들과 어울려 사는 것이 유일한 꿈이었습니다.

열매가 주렁주렁 매달린 과일 곁에서, 그들의 머슴이 되어 조용히 살고 싶었습니다. 과수원 한쪽에 통나무로 엮은 집을 마련해놓고, 그 안에서 송진 냄새를 맡으며 촌부(村夫)로 살고 싶었습니다.

이것은 당시 나뿐만이 아니라 많은 젊은이들의 생각이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흙의 아들이고 흙의 딸이라고 여겨 땅이 부모이고 조상이라 생각하며 땅과 함께 살아야 한다고 여길 때였으니까요.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는 누구나 순박했습니다.

모든 것을 순리대로 따라가며 풀처럼, 때로는 바위처럼 살았으니까요. 모두 그렇게 살다, 그곳의 흙이 될 것이라고 믿고 살았습니다. 이것을 보면 사람을 만드는 것은 교육이나 법, 제도 같은 것이 아니라, 자연임이 분명합니다. 자연이 도덕이고, 신앙의 대상이었으니까요.

나는 그때의 내 삶을 통해, 이것을 절실히 느꼈기에 과수원의 주인이 되고 싶었습니다. 이런 생각을 한 것은, 당시 ‘안성’은 농촌으로 비교적 한적한 시골이었기 때문이라, 그랬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운명이 스스로 알아서 새로운 길을 만들어놓고 나로 하여금 그 위를 걸어가게 했습니다. 이것도 세상은 마음처럼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입증해주는 예였습니다.

그 후, 대학진학을 위해 서울로 올라왔습니다.

전후(戰後)에 ‘배워야 살 수 있다’는 생각이 팽배해지고, 과수원 주인이 되는 것도 쉽지 않다는 것을 알았기에 궤도수정을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안성 주변에 문과대학이 없어, 하숙생활을 할 요량으로 짐을 싸서 안성탈출을 감행했습니다.

현실이 변하고 주변의 환경이 바뀌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것이 제 운명이었는지도 모릅니다.

문과대학에 입학한 인연으로 그때 평생의 운명적 반려자를 만났으니까요. 그 이름은 ‘수필’이었습니다. 성(姓)도 없이 이름만 있는 ‘수필’이었습니다.

과수원 주인의 꿈은 깨지고 말았지만, 후회하지 않는 것은 평생의 반려자를 만났기 때문입니다. 제약이 많지 않고 무슨 말을 해도 다 받아주는 이를 만나, 그 인연을 지금까지 이어오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다른 어떤 길에도 눈길 한 번 준 적 없이, 오직 한 길만을 고집하며 걸어올 수 있었습니다.

나는 내 ‘길’에 큰 불만 없이, 늘 고맙기만 합니다.

어느 면에서 보면 나는 낚시를 하는 강태공같이 살아왔습니다. 늘 무엇인가를 낚아 올리려 마음을 모으고, 한 곳만 주시하며 살아왔기 때문입니다. 월척(越尺)이 내 낚시의 ‘찌’를 움직일 때까지 숨죽이고 기다리는 시간을 보냈습니다. 사람 속에서 이해관계에 휘둘리지 않고, 내면의 세계에 잠겨 사는 일이 값진 일이라 여겨져, 다시 태어나도 또 같은 길을 갈 것입니다.

이 일은 앞으로도 갈 길이 무한해, 누군가는 이 일에 관리자가 되어 계속 이어가야만 합니다.

지금은 이전과 달리 사회의 변화가 빠르게 추진되고 있는 데다 물질지상주의가 판을 쳐, 유용한 물품을 생산해 실생활에 이용케 하거나, 기술을 개발하는 일이 더 잘 사는 일이고, 인류에 기여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런 것도 의미 있는 일이지만 다양화된 사회현실의 빈틈을 메우며, 서로 부딪혀 생겨나는 잡음을 조율해 순조롭게 함으로써, 분노의 불을 끌 수 있는 ‘문학의 전각(殿閣)’을 누군가가 지켜야 합니다.

소크라테스는 죽음의 시간이 다가오자 제자들에게 일렀습니다.

“저승에 가 이곳 사정을 얘기해 어떻게든 설득을 시켜놓고 돌아올테니…. 그동안 너희는 오직 학문에만 정진하고 있어야 한다. 돌아와 그렇게 하고 있지 않으면 절대로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먼저 깨우친 자가 있어야 세상이 변한다. 이대로 두면 세상은 돼지우리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

제자들은 이 말에 따라 촌음을 아껴 정진했기에 아테네의 철학과 수학 - 탄탄한 기반이 마련되어 플라톤과 같은 걸출한 인물을 만들어냈습니다. 수필의 ‘한 길’을 따라 걸어온 사람의 심정이나 기대 또한 소크라테스와 다르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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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정 윤 재 천

경기도 1932년 안성출생, 전 중앙대 교수, 상명여대 교수 등 ‌한국수필학회 회장, ‘현대수필’ 발행인, 한국문인협회 고문, 국제펜클럽한국본부 고문 등 저 서 수필문학론, 수필작품론, 현대수필작가론, 운정의 수필론 수필집 ‌ ‘구름카페’, ‘청바지와 나’, ‘어느 로맨티스트의 고백’, ‘바람은 떠남이다’, ‘윤재천 수필문학전집’(7권), ‘퓨전수필을 말하다’, ‘수필아포리즘’, ‘구름 위에 지은 집’ 등 수 상 ‌ 한국수필문학상, 노산문학상, 한국문학상, 올해의 수필가상, 흑구문학상, PEN문학상, 조경희 문학상, 산귀래문학상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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